며칠 전 페이스북에 어느 시인의 사과문이 올라왔다. 문단 내 성폭력 가해 지목자들의 SNS 사과문은 이제 다 욀 지경이다. 그들의 사과문은 다 똑같다. 피해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 두 번 세 번 도로 작성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사죄’와 ‘사과’, ‘용서’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하고 요사이엔 ‘보복’과 ‘고소’를 하지 않겠다는 말도 꼭 넣는다. 사실 나는 이번 시인의 사과문에 댓글을 슬쩍 남기고 싶었다. “어머나, 드디어 터졌네요!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요!” 그렇게 조금 빈정거리고 싶었다. 20년도 훨씬 넘은 일이지만 나는 그 시인의 오만방자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었던 행동들을 낱낱이 기억한다. 나는 작가지망생이었고, 스무 살이었고, 20여 년이 지난 후 시인은 당연히 나를 기억할 리 없어 종종 내 페이스북 포스팅에 점잖고 다정한 댓글들을 남기기도 했다. 그럴 때면 분노와 코웃음이 동시에 터지곤 했다.
문단 내 성폭력 고발은 여태 계속되고 있다. 국정농단 사태에 묻힐까봐 걱정하는 이들이 많지만 꼭 그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일만 일어나는 세상은 없고, 혹 그런 세상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는 잊고 누군가는 기억하기 마련이다. 그런 탓에 특히나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들의 희생을 담보로 한다. SNS에 사과문 몇 줄, 이별의 손수건처럼 날리고 가해 지목자들이 몸을 숨기고 나면 이제 피해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나. “그동안 애썼어. 괜찮아. 나아질 거야.” 토닥토닥 등을 두들겨주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면 이번 일은 그저 문단의 요란했던 한 시절 스캔들로 남고 말 것이다. 촛불집회에서는 차벽에 꽃 스티커를 붙여 꽃벽을 만든다지만, 이건 시인의 사과문에 ‘좋아요’를 붙일 일이 아니다. 현명한 연대의 방법을 반드시 찾아내야만 할 것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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