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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택일로 팔자를 만드는 헛헛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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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택일로 팔자를 만드는 헛헛한 사회

입력
2016.12.0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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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사회 운이라도 선물하고파”

예비부모 택일 위해 철학관 찾아

길일 2개ㆍ시간까지 받아

유도분만ㆍ제왕절개 요구 많아지자

병원서 출생 일시 먼저 묻기도

tvN 드라마 '호구의 사랑' 중 한 장면.
tvN 드라마 '호구의 사랑' 중 한 장면.

심모(32)씨는 다음달 첫 아이 출산을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병원에서 알려준 예정일은 내년 1월 4일이지만 지인의 추천으로 찾아간 서울 강남의 유명 철학원은 이달 31일과 1월 6일을 ‘길일(吉日)’로 꼽았다. 철학원 원장은 “두 날짜가 예정일보다 금전 운(運)이 좋다”며 심씨에게 출산 시기를 조절하라고 권했다. 심씨는 2일 “길일을 받아 유도분만을 할 생각이었는데 한 해 마지막 날은 또래보다 1년을 손해 봐 꺼려지고 6일은 출산을 맞추려다 진통이 올까 걱정”이라고 했다. “아이에게 태어나는 운이라도 선물하고 싶어 철학관을 찾았는데 오히려 고민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이다.

출산을 앞둔 예비 부모들이 점집을 찾고 있다. 과거에는 자녀가 태어난 날과 시간에 맞춰 운이 트이는 이름을 지어주려 철학원이나 작명소에 의존했으나, 요즘에는 좋은 팔자를 주기 위해 출생 시기까지도 사주에 기댄다.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출생 운부터 차별화시키고 싶은 부모의 바람이 반영된 씁쓸한 현상이다.

제왕절개 수술로 둘째를 낳기로 한 이모(34)씨도 지난 주 경기 성남시의 한 철학원을 방문했다. 이씨가 “병원에서 2~3주 뒤 수술을 추천한다”고 하자 원장은 부부의 생일과 출생시간, 태아 성별, 심지어 첫 아이 생일까지 물어본 뒤 날짜 2개를 정했다. 그는 한 날은 재복(財福)이 따르고 또 다른 날은 관운(官運)이 따르는 사주라고 설명했다. 이씨는 “사주를 맹신하지 않지만 원장의 그럴듯한 논리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어 정해준 대로 택일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점집들은 “개명은 가능해도 태어난 날짜는 바꿀 수 없다”고 예비 부모들을 유혹한다. 서울 마포구 A철학원 관계자는 “부귀와 장수 운명은 생년월일시와 뗄 수 없는 관계여서 오행(五行)이 조화를 이룰 때를 골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철학원은 출산 가능 기간을 고려해 부모 사주 등을 분석한 뒤 보통 2개의 길일을 건넨다. 2시간 간격으로 출생 시간까지도 구체적으로 정해 주고, 일시에 따라 ‘의료계 진출할 사주’ ‘법조인으로 성장할 사주’ 등 직업을 제시하는 곳도 있다. 평균 상담 비용은 10만원 선. 작명까지 하면 30만원까지 치솟는 등 저렴한 편은 아니지만 부모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고 있다. 엄마들이 자주 찾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출산일을 잘 찍는 곳을 추천해 달라”거나 유명 철학원을 공유하는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주가 좋은 날을 골라 유도분만이나 제왕절개를 원하는 산모들이 많아지면서 산부인과들은 종종 곤란을 겪기도 한다. 서울의 한 대형병원 산부인과의 의사 B(27)씨는 “얼마 전부터 아예 산모가 원하는 출산 일시가 있는지를 먼저 물어본다”며 “꼭 새벽 3시에 아이를 낳아야 한다며 무리하게 수술 일정을 잡아 모든 의료진을 깨워야 할 때 굉장히 난감하다”고 전했다.

출산 운에 대한 집착의 이면에는 무한경쟁 시대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는 불안감이 자리잡고 있다. 이른바 금수저가 아니고서는 대부분 비슷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탓에 사주라도 특별하게 하고 싶은 조급증이 커진 것이다. 최근 비선실세 논란 국면에서 각종 교육 특혜 의혹이 불거진 것도 한몫 했다. 최모(30)씨는 “자식을 위해 대학 학칙까지 바꾼 사람도 있는데 생일 하나 조절한다고 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부모 능력이 성공의 잣대가 되는 사회를 지켜 본 예비 부모들이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본다’는 마음으로 사주 철학에 의지하고 있다”며 “타고난 운보다 어떤 환경에서 성장하느냐가 훨씬 중요한 만큼 자녀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도록 인성을 길러주는 교육이 우선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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