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프로축구 슈퍼리그(1부) 옌볜FC를 이끄는 박태하(48) 감독은 옌볜조선족자치구에서 ‘神’으로 통한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와 길을 걸으면 팬들의 사진 촬영과 사인 요청에 한 걸음 내딛기가 힘들다. 옌볜이 지난 시즌 1부 잔류를 확정하던 날 한 60대 노인은 박 감독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큰 절을 했다. 조선족들에게 축구 클럽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옌볜의 사령탑 박 감독을 1일 경북 포항 영일만 해수욕장 앞 커피숍에서 만났다.
축구 그 이상의 팀 옌볜
옌볜은 2016시즌 슈퍼리그 강등 1순위 후보로 꼽혔다. 2000년부터 15년 간 2부 리그만 맴돌다가 승격한 팀이니 이런 평가는 당연했다. 박 감독은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내심 10위권을 예상했다고 한다. 선수들 개인 기량은 뒤지지만 끈끈한 팀 정신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봤다.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옌볜은 9위를 차지하며 당당히 1부에 잔류했다.
박 감독은 지난 시즌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두 개를 꼽았다.
9월 16일 허베이 화샤와 25라운드는 세계적인 명장 마누엘 페예그리니(63) 허베이 감독의 데뷔전이었다. 상대는 외국인 선수 영입에만 1,000억 원이 넘는 거액을 쓰는 ‘갑부 클럽’팀이었지만 옌볜이 3-2로 역전승을 거뒀다. 10월 24일 광저우 에버그란데 원정도 큰 화제를 모았다. 당시 옌볜의 코치들은 광저우 원정에 2군을 보내고 바로 다음 경기인 약체 스좌장 융창전에 ‘올인’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박 감독은 피하기 싫었다. 정면승부를 택했다. 0-1로 뒤지다가 종료 2분 전 윤빛가람(26)의 동점골이 터졌다. 분위기는 옌볜으로 넘어왔고 오히려 광저우가 백패스를 하며 시간을 끌었다.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광저우의 ‘잠그기’에 대해 날 선 질문이 쏟아질 정도였다. 옌볜이 ‘아시아의 공룡’광저우를 몰아치는 걸 본 조선족들은 일제히 눈물을 흘렸다.
옌볜은 가깝고도 먼 곳이다. 우리는 ‘옌볜’하면 흔히 ‘보이스피싱’이나 영화 ‘황해’를 떠올린다. 조선족들도 그들대로 한국인에 대해 반감이 적지 않다. 이런 간극을 옌볜 축구팀이 좁혀줬다. 박 감독은 “축구를 통해서 인식을 바꿀 수 있다는 게 행복하다”며 “옌볜은 음식도 뛰어나고 공기도 맑아 중국에서 황사가 없는 지역이다. 인심도 후하다”고 덕담을 쏟아냈다.
내년 목표요?
박 감독은 국내에서 활동할 때 성실하고 입이 무겁고 능력 있는 ‘코치’로 통했다. 축구대표팀 코치로 2010 남아공월드컵 16강, 2011 카타르 아시안컵 3위를 차지했고 2012년에는 세 살 아래 최용수(현 장쑤 쑤닝 감독) FC서울감독을 보좌하는 수석코치로 일하며 정규리그 우승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만년 코치’라는 족쇄가 되기도 했다. 동기인 황선홍, 홍명보는 물론 후배들이 프로 감독을 할 때도 그에게는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박 감독은 2013년부터 2년 동안 봉고차로 직접 아이들을 실어 나르며 허정무ㆍ거스 히딩크재단에서 중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옌볜은 그가 감독을 맡은 첫 팀인 동시에 지도자 인생에 날개를 달아준 곳이다.
2014년 말 처음 옌볜을 맡았을 때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선수들에게 운동장 트랙을 7바퀴 뛰게 했는데 태반이 중도 포기했다. 기본적인 규율도 없었다. 박 감독은 사소한 것부터 바꿨다. 원정만 가면 힘을 못 쓰는 걸 보고 최고급은 아니어도 깨끗하고 음식 잘 나오는 호텔을 잡아달라고 구단에 건의했다. 옌볜 구단은 선수들 급여를 종종 늦게 지급했다. 당연히 줄 임금을 선수들과 ‘밀당’의 도구로 활용했다. 박 감독은 월급 날짜를 정확히 지켜달라고 요청했다. 대신 선수들에게는 프로 의식을 강조했다. 잔소리를 귀찮아하던 선수들도 감독 말을 들으니 컨디션이 달라지는 걸 느끼고 스스로 변해갔다.
박 감독은 최근 옌볜과 2년 연장 계약했다. 중국의 다른 클럽과 한국 프로축구 몇몇 팀도 러브 콜을 보냈지만 주저 않고 재계약에 사인했다. 다음 시즌 목표를 묻자 그는 “당연히 강등 탈출”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도전은 계속된다. 뭔가 하나 이뤄내고 싶은 마음도 있다”는 말에서 좀 더 큰 꿈이 느껴졌다.
포항=글ㆍ사진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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