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남길(36)에게 영화 '판도라'(12월7일 개봉)는 자신 있게 도전한 작품이었다. ‘판도라’는 최대 규모 강진으로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한 뒤 방사능 유출 공포가 대한민국을 뒤덮는 최악의 상황을 담고 있다. 김남길은 처참한 재난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는, 원전 기술노동자 재혁으로 등장한다. 1일 오후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김남길은 대본을 받자마자 "욕심을 냈다"고 했다.
한 장면이 그를 강하게 끌어들였다. 영화 막바지 극한의 상황에 몰린 재혁이 5분 남짓 가족들을 향해 오열하는 대목이었다. 김남길은 "배우라면 누구나 대본 속에서 한 두 장면에 욕심을 내는데 이 장면이 바로 그랬다”고 말했다.
두 가지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36년 서울 토박이로 살아온 그가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해야 했다. 경상도 사람이 들어도 토를 달 수 없도록 완벽하게 해야 했고 극도로 사실적인 연기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하지만 김남길은 “마지막 장면은 걱정도 하지마! 그 누구보다 호기롭게 잘 해내주겠어!”라는 마음도 가졌다고 한다.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잘하면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 내는 훌륭한 장면이 되겠지만, 김남길이 못하면 그저 그런 재난영화의 신파장면이 될 것”이라고 영화 스태프들이 겁도 줬다. 김남길은 ‘판도라’의 대본을 받자마자 해당 장면의 대사부터 연습했다. 긴 대사는 차치하고라도 경상도 사투리 공부가 시급했다. 극단 선배를 찾아가 조언도 구하고, 경상도 발음을 가르쳐줄 선생님도 만났다. 오죽했으면 그가 ‘판도라’의 박정우 감독에게 “서울에서 공부하고 온 막내 아들로 설정해 사투리를 쓰지 않는 건 어떤가”라는 의견까지 낼 정도로 높은 장벽이었다.
경상도 억양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며 대사를 하다가 박 감독에게 한 소리를 듣기도 했다. “박 감독님은 일단 사투리를 못해도 되니까 편안하게 연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주셨습니다. 나중에 후시녹음을 해도 되니까요. 하지만 3~4개월 사투리를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또 주셔서 저에게는 다행이었습니다.”
지진과 원전 폭파, 방사능 유출 등 여러 위험한 상황을 그리다 보니 촬영 현장 역시 재난 상황 같았다고 한다. 할리우드식 재난영화처럼 웃음을 유발하는 잔재주를 부릴 수 없었다. 박 감독은 “의도적으로 코믹한 부분을 뺐고” 배우들의 애드리브도 자제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김남길은 “박 감독과 다른 의견을 보이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내내 진지하게 간다면 “자칫 지루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박장대소는 아니더라도 관객들에게 긴장을 풀어줄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박 감독은 “누가 그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겠느냐. 한국 정서로 사실적이었으면 좋겠다”고 촬영 내내 주장했다.
애드리브 등 코믹한 설정을 뺀 게 ‘신의 한 수’가 됐다. 4년 전 기획되고 1년 전에 촬영을 완료한 영화가 현 시국과 비슷하게 맞물리면서 관객이 현실감 있게 받아들일 장면들이 적지 않다. “지난 9월 경주에서 강진이 발생하는 걸 보고 정말 깜짝 놀랐어요. 마치 ‘판도라’가 예언처럼 들어 맞았으니까요. 게다가 현재 시국과도 겹치는 설정(무능력 정부)들이 있어서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았으면 큰일날 뻔 했습니다.”
영화는 원전의 잠재적 위험에 대비하지 못하는 정부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려는 소시민들의 활약을 대조한다. 안전 불감증에 경각심을 불어넣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오래 전에 기획됐던 영화가 현실화 되는 걸 보고 우리나라도 안전지대가 아니구나 싶어요. 시국과 닮아 있는 영화가 관객들에게 피로도를 높여주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됩니다. 하지만 희망적인 메시지로 그 마음을 위로해드릴 수 있을 겁니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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