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촬영을 마쳤다. 곧 개봉한다는 말이 나온 지 1년. 관계자들은 “컴퓨터 그래픽(CG) 등 후반작업”을 이유로 들었으나 영화계에는 설왕설래가 많았다.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한 사고를 소재로 했기에 극장가에 나서지 못할 것이라는 풍문이 떠돌았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외부 투자기관에 위탁한 모태펀드로부터 투자 철회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정부의 눈밖에 나 벌어진, 이례적인 일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변호인’(2013)의 투자배급사 NEW의 작품이라 의구심이 더 컸다. 29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 멀티플렉스에서 언론시사회를 통해 첫 공개된 재난 블록버스터 ‘판도라’는 그렇게 곡절을 연료 삼아 호기심과 기대를 키웠다.
영화는 동남권 한 원전을 주요 공간으로 펼쳐진다. 원전이 주요 풍경으로 자리잡은 것 외에는 특별하지 않은 소도시는 어느 날 아비규환의 재난을 맞이하게 된다. 지진 뒤 낡은 원전에 문제가 발생하고, 정부는 사건 초기 단계부터 입막음에 급급하다. 작은 피해로 끝낼 수 있었던 사건은 정부가 늦장 대응과 책임 회피로 일관하면서 전국적 재난으로 번지고 국가는 절체절명의 위기로 내몰린다. 원전 직원 재혁(김남길)과 그의 어머니(김영애), 형수 정혜(문정희) 등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원전을 둘러싸고 예기치 못한 인간애가 펼쳐진다. 한국일보 영화담당 기자들이 ‘판도라’에 대한 첫 인상을 전한다. 감독 박정우, 12월 7일 개봉, 12세 관람가.
◆영화 ‘판도라’ 20자평
※★ 다섯 개 만점(☆는 반 개)
답답한 현실을 우직하게 반영하다
제작비 100억원 가량의 영화이나 재난영화의 상업적인 공식을 굳이 따라가지 않는다. 웃음과 눈물을 적당히 버무리려 하지 않고 원전 반대라는 진지한 메시지를 뚝심있게 몰아붙인다. 어둡고 어두운 장면들이 바통을 이어받으며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각성케 한다.
상투적인 면도 있다. 한국 재난영화의 단골인 무능하고도 탐욕스러운 관료가 등장한다. 돈을 우선시하고, 전문성과 안전을 무시하는 부패의 고리를 암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재난을 겪고도 인재(人災)가 반복되는 한국의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기도 한다.
1년여 전 촬영을 마친 영화인데도 의도치 않게 현 시국과 겹치는 장면들이 적지 않다. 대통령은 비선을 통해 특별한 보고를 받고, 대통령에게 곧은 말을 전하려는 사람들은 자리에서 쫓겨난다. 실세 총리가 대통령을 꼭두각시 취급하며 전횡을 일삼기도 한다(총리를 다른 사람으로 바꿔놓으면 한숨이 나온다). 재난 발생 뒤 대통령이 대피 매뉴얼을 묻자 행정안전부 장관은 “그런 것은 없습니다”라고 답한다. “사고는 지들이 쳐놓고 국민들이 수습하라고 한다”는 재혁의 일갈이 통쾌하면서 씁쓸할 수밖에. 한 원전 직원이 대통령 담화 발표 소식을 듣고서 “뭔 헛소리를 지껄이려고”라며 분통을 터트리는 장면은 답답한 현실을 절감케 한다. 만듦새는 투박하고 헐겁지만 우직하게 현실을 담으려 한 용기만으로도 박수 받을 만한 영화다.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무능한 정부를 향한 강렬한 외침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하는 시점에 무능한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판도라’를 마주하게 될 줄이야. '판도라' 제작사나 배급사도 생각지 못했을 시간 다툼이었을 터. 박 대통령이 의도치 않게 '판도라'의 홍보를 해준 셈이 됐다.
'식물 대통령'으로 인한 무정부 상태와 다름없는 현재의 상황과 제대로 맞닿아 있다. '판도라'는 재난영화라는 정석을 따라가면서도 무능한 정부를 향한 외침의 강도를 더욱 높였다. 올해 개봉한 영화 '부산행'과 '터널'의 정부 비판은 애교 수준. 영화는 강력한 메시지를 남기겠다는 듯 136분 동안 차분하게 현실의 문제를 조목조목 꼬집는다.
원전 사고와 방사능 유출의 공포가 극에 달하는 상황이 완성도 있는 CG로 구현된다. 그러나 '판도라'를 보는 묘미는 4개월의 제작기간이나 5,000평의 광대한 세트장 등 외형이 아니다. 영화가 당대를 대변하는 목소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는 것에 감사하다. 국가재난방송 주관방송사인 KBS가 아닌 종합편성채널(종편) JTBC의 보도가 스크린을 채우고, 대통령에게 구체적인 상황보고를 막는 보고 시스템의 붕괴, 대한민국 전체의 안전 불감증 등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소름이 끼친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판도라'는 향후 대통령에게 지침서가 될 만한 모범답안을 제시한다. 직접 행동하고 나서라. 그리고 스스로 판단하라.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영화이지만, 또한 영화가 아니다
재난영화를 그저 영화로만 즐길 수 없는 건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짊어져야 할 숙명인 듯하다. ‘판도라’는 세월호 참사가 남긴 내상이 아직 아물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체감하게 한다.
원전 사고는 좀비 바이러스로 인한 환란(부산행)과 터널 붕괴사고(터널) 못지않게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끊임없이 현실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는 디스토피아가 스크린 위에 고스란히 재현된다.
사태 수습보다 정보를 통제하고 축소하는 데 급급한 정부 관료들의 무능에 속이 터진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경제적 손해를 먼저 생각하는 기업에게 분노가 끓는다. 언제나 그렇듯 재난 대처 매뉴얼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개인의 숭고한 희생밖에 기댈 곳이 없는 절망감에 눈물이 난다.
영화의 만듦새는 그리 빼어나지 않다. 그 빈틈을 대한민국의 오늘이 메워준다. 배우들의 연기도 생생하다. 그래서 “억울하고 분하다”는 주인공의 절규에 절절히 공감하게 된다. 영화는 탈핵의 메시지를 선명하게 품고 있다. 개봉 이후 탈핵에 대한 사회적 논의까지 이끌어내지 않을까 싶다. ‘판도라’는 두렵더라도 상자를 열어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내자고 독려하는 영화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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