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정성호가 무심결에 왼팔로 반대편 팔을 붙잡기만 해도 주변에서 깜짝 놀라면서 그런 동작은 하지 말라고 말렸다.” 최근 한 방송 관계자가 귀띔한 얘기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 박 대통령을 연상케 하는 사소한 동작 하나까지도 금기시될 만큼 엄혹했던 분위기를 보여주는 일화다. 정성호는 18대 대선을 앞둔 2012년 tvN 코미디프로그램 ‘SNL코리아’에서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외모와 말투를 패러디한 ‘박그네’ 캐릭터를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박 대통령 취임 이후 ‘SNL코리아’에서 정치 풍자가 자취를 감추면서 박그네 캐릭터도 사라졌다. 그럼에도 박그네에 대한 보이지 않는 ‘압박’은 계속됐다.
개그맨 이상훈은 지난 5월 KBS2 ‘개그콘서트’의 ‘일대일’ 코너에서 ‘쉽게 돈을 받을 수 있는 계좌’를 묻는 질문에 “어버이연합이다. 어버이연합은 가만히 있어도 계좌로 돈을 받는다. 전경련에서 받고도 입을 다물고 전경련도 입을 다문다”고 현실을 풍자했다가 어버이연합으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피소됐다. 개그맨 최효종도 2011년 ‘개그콘서트’의 ‘사마귀 유치원’ 코너에서 국회의원 선거 공천 과정에 대해 풍자했다가 당시 무소속 강용석 의원의 고소로 한동안 곤욕을 치렀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위축되기 시작한 정치 풍자 코미디는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로 사실상 전멸하다시피 했다. 정권 차원의 외압과 통제의 정황들이 곳곳에서 목격됐다. 웃자고 던진 개그에는 고소장이 날아왔고, 뜬금없는 방송 하차나 암묵적 출연 제재 조치를 당한 연예인들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방송가에선 “군사독재 시절로 회귀한 것 같다”거나 “통제가 심해서 노이로제 걸릴 지경”이라는 한탄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관계자는 “고소 당하는 게 두렵기도 하지만 경찰이나 법원에 불려 다니는 게 피곤해서라도 자기검열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SBS ‘웃찾사’에서 시사이슈를 다룬 ‘LTE뉴스’ 코너를 이끌어온 개그맨 강성범은 “3~4년간 꾸준히 진행해온 지방자치단체 행사들의 섭외가 뚝 끊겼다”고 했다.
‘LTE뉴스’는 2014년 방영 당시 외압설에 시달렸다. ‘웃찾사’에서 이 코너만 인터넷 다시보기에서 삭제되거나 재방송에서 제외되는 일이 벌어졌다. 정부 여당의 항의를 받은 방송사 경영진이 코너 내용을 사전 검열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알맹이가 빠진 풍자에 회의감을 느낀 출연진과 제작진은 결국 코너를 스스로 내렸다.
“정권이 바뀌기를 바랄 뿐”이라는 푸념밖에 할 수 없었던 코미디프로그램들은 최순실 게이트로 해빙기를 맞았다. 사상초유의 국정 농단 사태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해학적으로 승화한 정치 풍자가 활기를 띠고 있다. ‘웃찾사’는 지난 10월 첫 선을 보인 ‘살점’ 코너에 이어 이달부터 부활시킨 ‘LTE뉴스’와 ‘내 친구는 대통령’까지 풍자 코너만 3개를 선보이고 있다. ‘LTE뉴스’와 ‘살점’은 현 시국을 날카롭게 꼬집는 돌직구 풍자로 환호를 받고 있고, 폐지됐던 ‘내 친구는 대통령’은 최순실 게이트를 예견한 코너로 회자돼 다시 무대에 올려졌다. ‘개그콘서트’도 부활한 ‘민상토론’에서 정치 풍자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현실까지 코미디로 녹였다. 현 시국만 해도 풍자거리가 넘쳐나는데, 이 국면이 차기 대선까지 이어질 터라 오랜만에 정치 풍자 전성기가 다시 오지 않겠냐는 기대 섞인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풍자를 하되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SNL코리아’는 지난 5일 방송에서 최순실 닮은꼴 캐릭터를 등장시켜 특유의 풍자 정신이 되살아나는 듯했지만 그 이후로 3주째 풍자가 실종돼 실망감을 안겼다. tvN 관계자는 “게스트에 따라 컨셉트와 아이템을 달리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이미경 CJ E&M 부회장이 청와대로부터 퇴진 압력을 받았다는 의혹이 나온 뒤 괜한 구설에 휘말릴까 몸 사리기를 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개그콘서트’도 정치 관련 이슈에는 말을 아끼자는 지침이 암묵적으로 공유된 것으로 전해진다. 한 개그맨 측 관계자는 “정치 풍자를 하고 싶어도 제작진이 기회를 주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 아니냐”며 “현 시국에 편승한다는 인상을 줄까 봐 도리어 풍자에 몸을 사리는 분위기도 있다”고 말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풍자 코미디가 반짝 부활에 그치지 않기 위해선 현 시국이 끝난 이후에도 풍자 코미디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회적 억압에 숨통을 틔워주는 풍자의 역할이 자리잡도록 사회적 지지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풍자가 일회성 소비에 그치지 않고 시청자의 공감을 사기 위해선 관계자들의 노력도 필요하다. ‘LTE뉴스’ 폐지 이후에도 ‘역사 속 그날’과 ‘뿌리 없는 나무’ ‘부장아재’ 등의 코너를 통해 꾸준히 시사 이슈를 다뤄온 ‘웃찾사’의 안철호 PD는 “시사 개그를 잘못하면 그 대상을 희화화해 조롱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며 “철저하게 확인된 팩트만 소재로 다뤄야 한다”고 조언했다. “의혹을 소재로 다룰 경우엔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안 PD는 “혹시 모를 외압에 대한 걱정이 전혀 없지는 않다”면서도 “지금은 정치 풍자를 하는 것이 코미디프로그램의 의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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