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고집에 퇴진싸움 장기화 전망
유리한 판세 믿고 독주하면 역풍 맞아
공생과 분권, 연대 열린 자세 아쉬워
박근혜 대통령은 5차 촛불집회가 열린 26일 청와대와 불과 200m 떨어진 곳까지 육박한 시민들의 퇴진 외침을 생생히 들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실망스럽게도 촛불은 거센 찬바람에도, ‘하야~ㄴ’눈발에도 꺼지지 않고 더 거세게 타오르는 중이다. 지난주 말 전국의 광장에 몰려나온 190만 인파가 전부는 아니다. 국정지지도 4%에 비춰 거의 모든 국민이 더 이상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이미 맘 속으로 탄핵을 했다고 보는 게 옳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꿈쩍하지 않는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말 대로 5,000만 국민이 청와대로 몰려가도 안 물러날 기세다. 검찰의 대면조사에는 결국 응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시국수습 방안 마련 및 특검 임명 등 일정상 바쁘다는 핑계를 댔다. 물론 특검 수사도 별로 기대할 게 없어 보인다. 이미 ‘중립적 특검’이라는 자락을 깔아놓았다. 야당 추천 특검 후보 2명 중에서 1명을 선택해 임명은 하겠지만 실제 특검 조사 과정에서는 온갖 핑계를 내세워 회피로 일관할 개연성이 농후하다.
결국 국회의 탄핵 소추 및 헌재의 탄핵 결정 과정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버틸 심산이다. 바로 이게 박 대통령이 처음부터 염두에 뒀던 복안이었을 것이다. 이 길로 가면 최대 8개월까지도 시일이 걸릴 수 있다. 그 사이 국내외의 온갖 변수에 기대를 걸며 반전을 꾀할 요량인 모양이다. 국민의 피폐해질 삶이나 나라 안팎 형편은 전혀 알 바 아니라는 고약한 심보다.
전직 국회의장, 국무총리 등 여야 정치원로와 종교계 지도자들이 “당면한 국가위기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차기 대선 등 정치일정을 감안해야 한다”며 적어도 내년 4월까지 하야를 촉구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우리 사회 원로들의 이 충언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질서 있는 퇴진은 물 건너 갔고 결국 장기전이 불가피해졌다. 야 3당은 이를 일찍부터 간파하고 대비해야 했지만 눈앞의 정치적 손익계산에 매달리다 이미 한 달을 허비했다.
앞으로 전개될 정국에서 가장 주목받고 어깨가 무거울 사람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다. 그는 여야를 통틀어 차기 대선주자 중 가장 지지도가 높다. 지금 당장 대선이 실시되면 어떤 구도에서도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 최순실 국정농단 정국에서 최대 수혜자 지위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문 전 대표는 최근 대학가를 순례하며 이어가고 있는 시국대화에서 연일 개헌 반대 입장을 펼치고 있다. 지금 상황만 해도 혼란스러운데 어떻게 개헌 논의를 더 할 수 있겠는가, 박근혜 퇴진 운동에 혼란만 줄 것이라는 논리는 일면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정권 다 잡았다는 오만한 모습으로 비치는 것도 사실이다. 5년 단임 현행 헌법대로 조기에 대선을 치르자는 그의 발언에는 승자독식주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물론 광장의 민심은 개헌 논의에 부정적이다. 하루빨리 박근혜를 청와대에서 나오게 하고 자신들의 손으로 새로운 대통령을 뽑겠다는 쪽에 가깝다. 이런 분위기는 문 전 대표에게 불리하지 않다. 그러나 어느 한 정파, 한 정치인의 독식 형세 뚜렷해지면 국회에서 탄핵소추안 통과부터 문제가 될 수 있다. 새누리당 내에서 비박-친박 사이에 위치한 정진석 원내대표가 야 3당이 제시한 탄핵안 표결 일정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게 심상치 않다. 친박 패권주의 못지 않게 친문 패권주의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촛불시위 기세에 압도돼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한다 해도 ‘포스트 탄핵’ 정국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이 쉽지 않다. 박 대통령이 끊임없이 반전의 기회를 노리는 가운데 문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한 호헌파와 개헌을 고리로 제 3지대에 모이고 있는 개헌파의 갈등이 격화하면 상황이 복잡해질 수 있다. 이 혼란 중에 문 전 대표에게 패권주의, 승자독식, 독선의 이미지가 형성된다면 어느 순간 광장의 분노의 표적이 될 개연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지금 문 전 대표에게는 공존하고 연대하고 나눠가지겠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 거기에 그의 운명이 걸려 있다.
논설실장 wksle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