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에서 손을 꺼내기도 어려운 추위에 첫 눈까지 내렸지만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26일 밤 서울 광화문에는 150만명이 서 있었다. 벌써 다섯 번의 이끌림을 반복하는 중이다. 그 자리에는 한 번의 결석도 없이 참가한 청년이 있었고, 고교생 딸의 성화에 못 이겨 처음 광장과 만난 엄마도 함께였다. ‘처음 혹은 계속’을 외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처음 광장에 나왔어요”
① 딸 덕분에 정치 제대로 배웠네요
“감정에 휩쓸린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막상 와보니 아이들이 대견하고 뿌듯하네요.” 해가 지자 기온은 뚝 떨어졌지만 청와대로 향하는 행렬에 섞인 모녀의 표정은 한결 따뜻해졌다. 이은주(45ㆍ여)씨는 고교 1학년 딸 안정민(16)양과 함께 난생 처음 거리집회에 나온 참이었다. 4차 촛불집회가 열린 일주일 전까지도 정치와는 담을 쌓고 지내던 이씨였다. 그는 “박 대통령이 잘한 부분도 있어 망설였는데 딸 아이가 계속 권해 끌려 나왔다”며 “덕분에 국정농단의 실상을 제대로 안 것 같다”고 말했다. 곁에 있던 안양은 “탄핵은 1년 가까이 걸려 임기를 마치기 전에 박 대통령은 즉각 하야해야 한다”며 엄마를 채근했다. 딸과 사이 좋게 촛불을 하나씩 나눠 든 이씨는 “정치도 배우고 축제처럼 즐기는 집회 분위기 제대로 체험했다”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② 역사의 현장에 있고 싶어 서둘러 예매했죠
경남 창원시에서 단감농사를 짓는 김하응(56)씨는 부인, 딸 부부와 이른 아침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얼마 전까지 단감을 수확하느라 정신 없이 보낸 탓에 최순실 게이트는 뉴스로만 접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TV로 보던 것과 현장 분위기는 너무 다르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한 목소리를 낼 줄 몰랐다”고 했다. 김씨는 고교 졸업 직후 유신독재 반대시위인 ‘부마항쟁’을 겪었다. “마산에 가서 최루탄도 맞아봤고 87년 민주화항쟁 때도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가 굳이 상경을 고집한 것도 시민들의 직접 참여가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김씨는 “박 대통령은 절대 제 발로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며 “야당에도 나라의 운명을 맡길 수 없는 만큼 결국 국민의 손으로 민주주의를 복원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③ 부끄럽지 않은 어른 되고 싶어 용기 내
앳된 얼굴의 소녀들은 촛불집회 현장 맨 앞 자리를 차지하고 시민들 발언을 조용히 경청했다. 이지윤 윤선하 이진(15)양은 서울 대방중 3학년 같은 반 친구들이다. 일주일 전 한 방송사에서 세월호 참사 당시 대통령의 7시간 공백을 다룬 프로그램을 보고 시민들과 함께 목소리를 내고 싶어졌다. “또래 친구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대통령은 손을 놓고 있었어요. 대한민국을 책임질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세 친구는 거리에 나오고서야 비로소 존경스러운 어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지윤양은 “처음에는 걱정이 많았는데 거리도 깨끗했고 어른들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이들은 “열심히 공부해 대학생 언니 오빠들처럼 멋진 발언도 하고 정치로 생긴 문제를 정리해주는 훌륭한 어른이 될 것”이라며 무대를 향해 다시 귀를 쫑긋 세웠다.
④ 광장만한 산 교육의 현장은 없어요
“교사로서 말로만 떠들던 정의를 대통령이 지키지 않으니 체험학습을 시키지 않을 수가 없네요.” 경북 문경시 문창고에서 2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교사 정지성(35)씨가 선택한 현장학습 장소는 학교에서 190㎞ 떨어진 서울 광화문광장이었다. 정씨는 “가장 중요한 다음 세상을 살아갈 제자들에게 정의는 글자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1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장관을 아이들은 평생 간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자 4명도 선생님을 따라 가겠다며 의욕을 불태웠고 기어이 부모님을 설득해 허락을 받아냈다. 정 교사와 동행한 황인우(17)군은 “집회 참여는 오늘 하루뿐이지만 집에 돌아가서도 시민들과 꾸준히 소통하며 정권 퇴진에 힘을 보태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다섯 번째 촛불 듭니다”
⑤ 청년실업에 응답할 때까지 외쳐야죠
조성래(30)씨는 서울 성동구 근로자복지센터에서 비정규직 청년들을 상담하고 돕는 일을 한다. 100번 넘게 자기소개서를 썼던 자신의 경험을 살린 것이다. 그가 느끼기에 박근혜 정부의 청년정책은 더 퇴보했다. 비정규직은 늘었고 정규직 전환은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조씨는 “취업이 어려우면 중동으로 가라는 박 대통령 말을 듣고 청년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지난달 29일부터 꼬박꼬박 촛불집회에 참석한 이유다. 하지만 분노만 하고 있을 수 없다. 그는 상담과 별개로 독거노인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청년뿐 아니라 독거노인은 우리사회에서 돌봄이 가장 필요한 취약계층이에요. 박 대통령은 더 나은 나라를 만들어 가려는 청년들의 노력과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⑥ 바람에 꺼지지 않는 ‘횃불’로 저항
“촛불이 바람에 꺼진다기에 횃불을 들고 나왔다”는 사진작가 곽명우(50)씨는 집회 현장에서 시민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홀로 일하는 직업 특성상 뜻을 나눌 동료도 많지 않지만 매번 빠지지 않고 촛불집회에 나오고 있다. 곽씨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기쁨”을 만끽했다고 했다. 횃불을 들고 있는 자신과 사진을 찍으려는 시민들을 보며 “국민의 의지가 촛불이 아닌 횃불처럼 불타오른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낀다”며 웃었다. 예술가로서 사명감도 그를 광화문광장에서 떠날 수 없게 한다. 곽씨는 “현장을 포착해야 하는 사진작가가 온 국민의 염원이 담긴 민주주의의 성지를 외면한다면 자격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 없다”며 “횃불로도 박 대통령이 물러나지 않으면 동료 작가들이 광장에 차린 캠핑촌에서 숙박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⑦ 성소수자여서, 청소년이어서 차별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를 밝힐 때마다 외면을 받았어요. 그러니 계속 나올 수밖에 없죠.”
자신을 성소수자라고 밝힌 한송이(14)양은 나이와 성 정체성을 이유로 서러움을 곱씹었던 지난 시절을 떠올렸다. 하지만 삐딱한 시선은 모두가 한 목소리로 정권 퇴진을 외치는 집회 현장에서도 다르지 않다. 한양은 “어른들은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기특하다고 하다가도 성소수자라고 밝히면 금세 색안경을 끼고 본다”고 말했다. 그래도 청소년이나 성소수자 역시 엄연히 말할 권리가 있고, 우리사회의 주체라는 걸 알리고 싶어서 촛불집회에 매번 참석하고 있다. “국정농단 같은 거창한 부조리뿐 아니라 ‘을’이기 때문에, 소수자이기 때문에 받은 억압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한양의 손에는 ‘여성혐오를 멈추라’ ‘청소년 참정권 보장’ 등 다양한 주장이 적힌 팻말이 들려 있었다.
⑧ 시민도 노동자입니다
신재용(26)씨는 ‘노동조합이 거리로 나오면 평화집회가 어려워진다’는 인식에 단호히 반대한다. 학생들이 동맹휴업을 통해 정권에 맞서는 것이나 노동자가 파업으로 박 대통령의 퇴진을 압박하는 건 같은 이치라는 게 신씨의 생각이다.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꿈꿔 왔다는 그는 시민은 노동자라는 신념으로 이른 나이부터 노조 전임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현재 서울성모병원에서 병원 노동자들을 대변한다. 신씨는 “최근 유명 대형병원이 박 대통령 비리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접하고 그 동안 의료민영화와 성과연봉제 등 노동자와는 무관한 정책들이 ‘부역자’들을 위해 도입됐다고 확신해 병원에만 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노조에 속하지 않아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 노동자로서 박근혜 대통령은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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