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 반대한 장군
구정대공세 뒤 보고서 작성
“미군이 있어야 할 이유 없다”
한직 좌천… 해군 소장 예편
1960년대 미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전략 작전실을 이끌던 미 해군 소장 진 라 로크(Gene R. La Rocque)는 68년 베트남 전선을 둘러본 뒤 전쟁에 반대하는 요지의 보고서를 썼다. “왜 미군이 베트남에 있어야 하는지, 왜 그 전쟁을 지속해야 하는지 납득할 만한 무엇도 찾지 못했다.”(86년 10월 뉴요커) 확전의 계기가 된 북베트남 ‘구정대공세’ 직후였고, 전쟁 그만하자는 말을, 그것도 군 수뇌부가 꺼내기 무척 어려운 때였다. 국방부와 워싱턴 정가의 누구에게도, 당연히 인사권에게도 환영 받을 대답이 아니었다. 그들이 원한 건 어떻게 하면 단시일 내에 승리할 수 있겠느냐는 거였다.
1940년 22살에 해군에 자원 입대해 2차대전과 한국전쟁의 전장과 작전사령부를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했던 라 로크 소장의 군 경력은 사실상 거기서 끝이 났다. 보고서 제출 직후 그는 한직인 해군 정훈공보국(Pan-American Naval Affaris office)으로 전출됐고, 워싱턴 포트맥네어 국방대학장으로 3년 더 재직한 뒤 승진심사에서 탈락, 72년 예편했다. 그리고 곧장 군 출신이 만든 미국 최초의 민간 국방 싱크탱크인 국방정보센터(Center for Defence Information)를 설립, 펜타곤 매파들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진 라 로크가 10월 31일 별세했다. 향년 98세.
겁 없던 젊은 군인
2차대전 발발 직후 자진 입대
“전쟁보다 지루한 게 죽을 맛”
상륙전 앞장… 무공훈장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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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로크는 1918년 6월 29일 일리노이 주 캔커키(kaankakee)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자동차 대리점을 하다가 공황기에 망한 뒤 가구점을 운영했다. 12살 무렵 신문 배달을 했는데 공화당원이던 신문 발행인이 라 로크의 아버지가 민주당원인 걸 알고 그를 해고한 일이 있었다. 그날 어머니는 라 로크에게 공화당원과는 결혼도 하지 말라는 말을 해줬다고 한다.(NYT, 2016.11.4) 그는 2차대전 발발 직후인 40년, 일리노이대를 자퇴하고 해군에 입대했다. 이듬해 여름 태평양 함대 소속 구축함 맥도너(MacDonough)호에 배속돼 하와이 진주만에 배치됐고, 그 해 말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자신의 첫 전쟁을 치렀다.
그는 겁 없는 군인이었다. 그 지독한 태평양 전선에서 2차대전 당시 최신예 전투기로 꼽히던 일본 제로센의 폭격과 독일 U보트의 위협, 상륙전 등 12차례 전투에 참여하면서도, 전쟁보다 지루함을 견디는 게 더 죽을 맛(“I hated the boredom of four years”)이었다고 했다. 44년 마셜군도 콰잘레인(Kwajalein) 전투 때는 상륙정에서 맨 먼저 뛰어내려 로이 나머(Roi-Namur) 섬에 상륙한 게 그였다. 그는 동성(Bronze Star) 무공훈장을 받았다.
무수한 죽음을 목격했을 것이다. 전우도 잃고, 전함 룸메이트의 전사 소식을 가족에게 전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팔다리를 잃고, 눈을 잃고, 목숨을 잃고…, 무엇을 위해서? 늙은 자들은 이상과 깃발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연설을 들려주며 청년들을 전장에 보낸다.” 그렇게 가끔 회의하면서도 끝내 해군에 남은 것은 “(그래도) 미국이 이 세계의 민주주의를 지키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historyisaweapon.com)
전후부터 퇴임 직전까지 그는 해군과 합참 작전사령부에서 복무했다, 그는 50, 60년대의 냉전과 미소의 고삐 풀린 군비경쟁을 지켜보았고, 특히 미군 핵 증강의 명분을 찾고 의회를 설득할 근거를 만드는 일을 주도하기도 했을 것이다. 훗날의 그는 인류의 미래를 볼모 삼은 늙은 군인들이 자신들의 야심과 헤게모니를 위해 젊은 군인들의 선의(애국심과 민주주의의 열정)를 이용했다고 비난했지만, 사관학교 출신도 아닌 그의 승진이 말해주듯 그 역시 그들 ‘늙은’ 군인들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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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8월 23일 ‘진먼(金門) 포격전’이라 불리는 제2차 타이완 해협 위기가 발발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군대가 대륙 연안의 중화민국(대만) 영토인 진먼ㆍ마추(馬祖)도를 집중 포격하며 점령을 시도한, 한국전쟁 이후 동아시아 최대의 무력 충돌이었다. 미국 정부는 태평양 함대를 타이완 해협에 급파하고 현지 작전지휘본부를 설치하는 등 긴박하게 대응했다. 당시 합참 전략사령부에 라 로크가 있었다. 그는 미국은 중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며 현지 작전본부에 재래식 공격(conventional attack) 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했는데, 재래전 수행 능력이 없어 불발됐다고 전했다. “50년대 말 태평양 사령부 소속 전투기 중 재래식 무기를 장착한 건 1/3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두 전술핵미사일을 달고 있었다. 전세계 미군 상황이 그러했다. 50년대 내내 경쟁적으로 재래식 무기를 핵으로 교체해온 거였다.” 유사시 전술핵을 사용할 수 있다는 당시 미국의 ‘엄포’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국방부의 핵 사용 승인요청을 불허하지 않았다면, 만일 중국이 10월 5일 포격을 멈추지 않았다면, 아시아는 핵 전장이 됐을지 모른다. 라 로크는 진먼사태 이후에야 미 공군전투기의 재래식 무기 보강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핵 증강 경쟁은 국방부 안에서도 치열했다. 별도의 전략공군사령부를 두고 있던 공군의 우위가 흔들리게 된 건 58년 미 해군의 ‘폴라리스 프로그램 Polaris Program’, 즉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 (SLBM,Submarine Launched Ballistic Missile)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비로소 해군도 전략(핵) 공격능력을 갖추게 된 거였다. 당시 해군참모본부는 핵잠수함을 몇 대나 보유하는 게 좋을지 논의, 40대쯤으로 정했다. 라 로크에 따르면, “아무 근거 없이 거의 즉흥적으로 만든 안”이었다. “알레이 버크(Arleigh Burke,1901~1996) 해군참모총장이 그 보고를 듣더니 별로라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41대나 39대라고 해야 그럴싸해 보인다는 거였죠. 그렇게 41대의 폴라리스 잠수함이 탄생했습니다.(…) 핵잠수함은 (국가 안보가 아니라) 해군을 위해 탄생했고, 당연히 지금도 유효하죠. 물론 그 ‘어뢰’는 결코 쓰이지 않을 무기입니다.”(444openvault.wgbh.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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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냉전 핵 경쟁 주도권은, ‘가만한 당신’ 루스 레거 시버드 편에서 보았듯이 미국이 쥐고 있었다.(70년 미 군축청 보고서에 따르면 69년 NATO 국방비는 1,080억 달러인 반면 바르샤바조약기구는 630억 달러였고, 67년 소비에트가 520억 달러를 쓰는 동안 미국은 750억 달러를 썼다. 64~67년 사이 소비에트의 국방비는 16% 증가했고 미국은 47% 늘었다.) 펜타곤은 미-소 핵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여겼고, 압도적 승리를 위해 압도적 핵 우위를 원했다. 영화나 소설에서 흔히 묘사되듯 당시 미국 사회에는 핵 전쟁의 공포가 상존했고, 시민들은 국방부가 유포한 공포의 볼모였다.
1960년 대선에서 리처드 닉슨과 맞붙은 존 F. 케네디의 공약에도 소비에트에 비해 미국의 탄도미사일이 부족하다는 ‘안보 위기’공약이 들어있었다. 당선 뒤 케네디가 발탁한 민간인 출신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1916~2009)의 보고는 케네디가 알던 것과 사뭇 달랐다. 오히려 미국이 우위였다.(NYT, 1976.10.14) 하지만 케네디 재임기에도 군비 확장은 멈추지 않았고, 후임 존슨 정부는 베트남 전쟁을 치러야 했다.
라 로크의 생각이 바뀌게 된 결정적 계기는 알려진 바 없다. 저 과정을 겪으며 차곡차곡 쌓여온 환멸의 결과였을지 모른다. 전략 작전통으로서 별을 달고 베트남 보고서를 쓰던 68년의 그가 펜타곤의 야심을 몰랐을 리는 없을 것이다.
핵 감축을 부르짖다
CDI 설립, 펜타곤 매파와 전쟁
국방정보 분석해 민간에 제공
기고ㆍ강연 등 평화운동 힘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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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국방정보센터(CDI)는 전역한 위관급 이상 군인들을 주축으로 국방 정보를 분석 평가, 공식 발표와는 사뭇 다른 자료와 정보와 관점을 미국 시민들과 유엔 군축위원회, 미 의회 등에 제공하곤 했다. 당연히 정부 예산과 군수기업의 후원은 일절 받지 않았다. 기조는 반핵ㆍ군축ㆍ평화였다. 70년대 국가별 핵무기 보유실태를 최초로 공개한 것도, 미국 핵전함이 핵무기를 보유한 채 비핵국 영해를 항해하고 항구에 정박한다는 사실을 알게 한 것도 CDI였다. 미 국방부는 속으론 이를 갈았겠지만, 겉으로는 늘 ‘긍정도 부정도 않는다(NCND, No Confirm No Denial)’는 입장을 견지했다. 라 로크는 언론 기고와 강연 등으로도 분주했다. 73년 9월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그는 “(NATO를 탈퇴한 프랑스 전력을 제외하고도) 유럽 주둔 미군의 20%를 감축해도 바르샤바조약기구 전력과 대등한 수준이 되며, 바르샤바조약기구 전력의 상당부분은 동구 국가의 동요를 억지하기 위해 배치돼 있는 실정”이라고, “미군의 유럽 주둔이 소비에트의 위성국가 지배를 오히려 돕는 형국”이라고 비판했다. 76년 대선(지미 카터 v.s 제럴드 포드) 직전, 소련의 민방공체계가 워낙 잘 돼 있어 미국의 핵 반격이 효과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보도됐다. 훗날 CIA 연루설이 돌기도 했던 한 기자(C.L 슐츠버거)는 소련이 전면적 핵 공격을 받아도 인구의 7~10%밖에 희생되지 않을 것이라고 썼다. 그러니 미국이 더 강력한 전력(공격ㆍ방어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표면의 주장이었다면, 안보 위기설로 국방부에 우호적인 후보를 도우려던 게 이면의 욕심이었다. 라 로크는 즉각 반박 칼럼을 썼다. “핵전쟁은 어느 국가도 해본 적 없고, 누구도 그 파괴력을 산정할 수 없다. 그 불확실성이 가장 강력한 핵 억지력이다.(…) 시민의 생명을 구하는 길은 민방위 강화가 아니라 핵전쟁을 막는 것밖에 없다.(…) 전쟁을 만드는 건 시민이 아니라 정부다. 그러므로 다가오는 11월 우리는 기괴한 핵 증강 프로그램을 억제하려는 이를 군통수권자로 선출해야 한다.”(NYT, 76년 위 기사)
1980년 퇴역한 해군소장 유진 캐럴(Eugene Carroll Jr.,1923~2003)도 CDI에 합류했다. 80년대 초 레이건 행정부가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인 MX미사일(공식 명칭이 LGM-118A Peacekeeper다)의 실전 배치 계획을 발표하자 “핵미사일을 ‘평화의 수호자’라 부르는 것은 단두대를 두통약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이다.
그들 CDI 베테랑들의 활약이 군축과 핵 감축에 얼마나 효과를 발휘했는지 평가하긴 힘들다. 라 로크가 83년 소비에트 방송 인터뷰에 응해 레이건 정부의 군비 증강계획을 성토하며 군축을 호소하자 미 퇴역 장성 500여 명이 보수언론 워싱턴타임스에 CDI를 비난하는 전면광고를 냈다. 라 로크의 사표를 수리했던 닉슨 정부 해군총장 엘모 줌왈트(Elmo Zumwalt, 1920~2000)는 “라 로크의 이상이 관철된다면 우리 아이들은 지금의 자유를 결코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워싱턴포스트, 201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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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로크는 줌왈트를 포함한 1,000여 개의 별들과 싸워 숱하게 패배하면서도, 적잖은 전략적 승리를 거두어왔다. 1968년의 핵확산방지조약(NPT)과 71년의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91년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유엔의 핵분열성물질생산금지조약(FMCT)과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 96년) 등 국제 사회의 핵감축ㆍ군축 논의들. 실제 핵무기 감축이 시작된 것은 88년 고르바쵸프 집권 말년부터였다. 국제 군축 평화단체 ‘Ploughshares Fund’리포트에 따르면 2016년 3월 현재 지구에는 9개국(북한 포함)에 1만5,375기의 핵무기가 존재한다. 80년대 정점에서 약 80%(약 6만여 기)가 줄어 간신히 50년대 말 수준으로 돌아간 것이다. 핵 무기 제조ㆍ폐기에 투입된 예산과 자원은, 군과 군수업체 등 일부 관계자들의 배는 불렸겠지만, 고스란히 낭비됐다. 라 로크를 비롯한 수많은 비핵ㆍ군축 활동가들이 핵이 등장한 이래 예견해온 일이었다.
라 로크의 궁극적 이상은 군축이 아니라 평화였다. 그는 저명 저널리스트 스터즈 터클(Studs Terkel)과의 85년 2차대전 구술사 인터뷰에서 자기는 전장의 악몽이 떠올라 전쟁 영화를 못 본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쟁을 영예롭게 치장하는 영화를 혐오한다. (…)나는 ‘(청년들의 죽음을 두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말하는 이들을 경멸한다. 우리가 그 젊은이들의 목숨을 훔치고 빼앗았다. 그들은 조국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죽은 게 아니다. 우리가 그들을 죽였다.”(historyisaweapon.com)
1986년 만성적인 미 군납비리를 폭로한 건, 81년 출범한 민간기구 ‘정부감시프로젝트(POGO)’였다.(LA타임스, 86.7.30) POGO는 75~84년 10년간 군수납품 계약자료를 분석, 펜타곤이 커피메이커 한대에 7,622달러, 몽키렌치 하나에 2,228달러, 변좌에 640달러를 지급하는 등 45건의 ‘부정’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라 로크의 CDI는 2012년 POGO와 통합했다.
그는 제 집단의 관성을 거스름으로써 조직(군부)이 아닌 국가(시민)에 충성하고자 했고, 그 길이 늙은 군인의 용기가 가장 빛나는 자리라 여겼다. 그가 미국 대선 결과를 보지 않고 떠난 건 그로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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