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위대함 중 하나는 국민이 다양한 방법으로 자기 뜻을 표현하는 것이다. 표현방식에는 시위도 포함된다. 역대 대통령 중에 어느 한 순간도 이런 항의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이는 없었다. 그래서 ‘시위가 나쁘다거나, 그걸 하지 말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건 선거이고 투표 결과다. 민주주의와 그런 삶의 방식은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선진국에서는 평화와 번영이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는 어려운 것이다.
국민들이 사실 관계를 제대로 모르면 큰 문제가 생긴다. 요즘처럼 짧고 강렬한 구호와 한 두 마디 소식이 사회관계망(SNS)을 통해 단숨에 유통되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뭐가 진실이고 아닌지를 구별하지 못하고, 진실되고 심오한 의견과 저열한 선동을 구별하지 못하면 심각한 사태로 이어진다. 정치 성향이 보수 혹은 진보이건, 좌파 또는 우파이건 민주적 질서를 지킬 의지가 없다면 큰 문제다. 타협을 거부하고 자기 생각은 ‘절대선’으로 상대방은 악으로 몰아붙인다면 민주주의는 깨질 수밖에 없다.”
50%가 넘는 지지도 속에 퇴임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최근 독일 순방 중 가진 기자회견에서 밝힌 내용 중 일부다. 민주주의의 소중함과 그 체제를 존속시키기 위한 민주적 절차의 중요성을 강조한 일반론이지만, 광화문 광장에서 매주 촛불이 타오르는 한국인들에게는 그 이상의 무게로 다가선다.
‘최순실 게이트’뉴스를 접하다 보면,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후보 시절과 비교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지난 대선 기간 중 미국 언론이 ‘미국을 위해 트럼프를 낙마시켜야 한다’며 ‘반 트럼프 연합’을 구축했던 것처럼, 한국 언론도 ‘보수ㆍ진보 대연합’을 이룬 모양새다.
트럼프가 그랬던 것처럼 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근거 없는 폭로 기사가 많다고 맞선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오보ㆍ괴담 바로잡기’가 생겼다. 사실 발기부전 치료제 구매로 청와대를 공격하는 건 평소라면 상상하기 힘들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고산병(高山病) 완화에 도움된다는 설명이 금방 나온다. 박 대통령 일부 지지자들이 보수성향 매체에 대한 절독ㆍ시청거부 운동을 선언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셈이다.
‘언론 대연합’은 촛불집회도 새롭게 조명하는 듯 하다. 보수 언론도 성숙한 시민의식을 강조한다. 광화문에 100만명이 모였고 평화로운 시위가 벌어졌다고 보도한다. 2008년 광우병 시위와는 딴판인 것 같아 놀랍다. 당시에는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모두가 광우병에 걸린다’는 대중의 공포심 위에 일부 단체가 그들만의 입장과 구호를 ‘물타기’했다. 이번에는 보수 언론조차 그런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워싱턴에서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게 틀림없다. 미국 언론과 전문가들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은 자기 나라부터 걱정해야 할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박 대통령이 갑자기 사퇴하면 주요 정당간 격렬한 승계 경쟁을 촉발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박 대통령을 대신할 후보들이 ▦연간 1억달러를 북한 핵개발에 지원한 개성공단 폐쇄 ▦중국이 반대하는 사드 배치 ▦북핵 대응을 위해 필수적인 일본과의 군사정보보호협정 등을 뒤집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성급한 탄핵(Rush to impeach)은 정치 개혁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워싱턴 싱크탱크의 한 전문가도 “정치적 격변으로 대북 정책이 뒤집어진다면, 미국도 우려하겠지만 정말 걱정해야 할 사람들은 한국인들”이라고 말했다. 몇 개월 뒤 이 전문가에게 “당신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었다”고 말하게 되길 바란다.
조철환ㆍ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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