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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마디마디 삶을 싣고 달린다

입력
2016.11.25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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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객이나 시민이라는 표백된 개념이 아닌, 피가 돌고 살아 숨 쉬는 우리들이 각자 제 몫의 인생을 끌어안고 지하철을 기다린다. 문학동네 제공
승객이나 시민이라는 표백된 개념이 아닌, 피가 돌고 살아 숨 쉬는 우리들이 각자 제 몫의 인생을 끌어안고 지하철을 기다린다. 문학동네 제공

나는 지하철입니다

김효은 글, 그림

문학동네 발행ㆍ60쪽ㆍ1만4,500원

지하철은 도시의 혈관이다. 도시의 살가죽 밑을 파고들며 구석구석 거미줄처럼 뻗어나간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톨처럼 사람들은 지하철에 실려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만나고 헤어지고 일하고 공부하고 울고 웃고 꿈꾸며 살아간다.

김효은의 그림책 ‘나는 지하철입니다’를 읽는다. 하나인 듯 이어진 하늘과 강을 가르며, 좌우로 나뉜 땅을 하나로 이으며 한강 다리 위 열차가 달린다. “나는 오늘도 달립니다. 매일 같은 시간, 매일 같은 길을.” 시원스런 사선 구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사람들이 땅속으로 내려간다. 개찰구를 지나는 사람들,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다시 책장을 넘기니 화면 가득 먹빛, 땅속 어둠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한 줄기 빛처럼 열차가 달린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 길 마디마디에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역에 다다른다. 지하철이 덜컹덜컹 몸을 뒤챈다. 문이 열린다. 허겁지겁 달려온 샐러리맨, 비릿한 냄새 풀풀 풍기는 할머니, 갓난아기에 기저귀가방에 개구쟁이 아들까지 챙기느라 정신 없는 아기 엄마, 구부정한 어깨의 중년 아저씨,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는 여학생, 길 잃은 아이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청년….

어제도 오늘도 그냥 지나쳐버린 익숙한 풍경 같은 이들을 작가가 불러 세운다. 나직하게 몰아 쉬는 한숨, 입꼬리에 남은 희미한 미소, 벌개진 목덜미를 쓸어 내리는 손, 비린내 밴 보따리에서 비어져 나오는 마음, 불거진 힘줄에 서린 자부심이 눈 밝은 작가의 조곤조곤한 글에, 수없이 거듭된 드로잉의 결과였을 성실한 그림에 담겨 생생하게 살아난다.

딸 바보 아빠 완주씨, 제주 바다에 한평생을 묻은 복순씨, 어느새 제 이름조차 낯설어진 연우 엄마 유선씨, 발끝에서 인생을 읽는 구두수선공 재성씨, 고민 많은 취업준비생 도영씨가 우리 앞에 서 있다. 풍경이 아닌, 그저 승객이나 시민이라는 표백된 개념이 아닌, 피가 돌고 살아 숨 쉬는 우리들이 각자 제 몫의 인생을 끌어안고 지하철을 기다린다.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가득 싣고 지하철이 달린다. 일곱 살 아들 생일에 사가는 고소한 치킨과 흰 셔츠에 밴 시큼한 땀 냄새와 졸음에 겨운 눈꺼풀을 싣고 달린다. 토요일이 오면 지하철은 촛불을 챙겨 들고 광장으로 향하는 가슴 뜨거운 이들을 제 품에 그득 안고 달릴 것이다. 목적지에 다다르면 덜컹덜컹 몸을 힘껏 흔들 것이다. 이번 역은 시청, 시청역. 이번 역은 광화문, 광화문역. 깜박 잠들었던 이들은 이내 깨어나 광장을 향해 힘찬 걸음을 내디딜 것이다.

최정선 어린이책 편집ㆍ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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