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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의 원근법] 대한민국 리셋을 향하여

입력
2016.11.24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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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달 내가 느꼈던 감정은 복합적이었다. 당혹ㆍ경악ㆍ참담의 감정은 때때로 분노 조절 장애를 겪게 했다. 지난해 젊은 친구들이 ‘헬조선’을 이야기했을 때 그래도 내심 이 나라가 모범적인 추격산업화와 추격민주화를 성취한 사회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박근혜ㆍ최순실 게이트’는 내 자부심을 산산이 깨트려버렸다.

이 칼럼에서 한 달 동안 사회학자인 내 시선에 잡혔던 것들을 모두 말하긴 어렵다. 오늘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두 차원에서 희대의 국정 농단 사태에 담긴 코드들을 정리해 보고 싶다. 국가의 차원에서 이 사태는, 첫째, 헌법의 제1 수호자여야 할 대통령이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정신을 부정한 사건이다(법적 측면). 둘째, 아무런 정당성을 갖지 않은 이들이 대통령과 공모해 공적 국가기구를 철저히 사유화한 사건이다(정치적 측면). 셋째, ‘발전국가’를 ‘약탈국가’로 후퇴시킨 사건이다(사회적 측면). 아버지 박정희 정부가 국가가 경제성장을 주도한 발전국가를 일궜다면, 딸 박근혜 정부는 사회학자 피터 에번스가 말한, 국가가 사회로부터 공물을 멋대로 거둬들인 약탈국가로 우리 사회를 퇴행시켰다. 넷째, 공공성의 상징적 거점인 대학입시마저 여지없이 유린해버린 사건이다(교육적 측면). 다섯째, ‘샤머니즘에 빠진 대통령’이란 외신 보도에서 볼 수 있듯, 21세기 제4차산업혁명 시대에서 돌연 원시수렵 시대로 되돌아간 듯한 시간 여행이 일대 문화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다(문화적 측면). 여기에 호빠ㆍ성형 시술ㆍ비아그라 등 놀라운 뉴스들을 보면 사회학 연구 30년 만에 처음 만나는,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이브리드 스펙터클’이라 할만하다. 당혹ㆍ경악ㆍ참담의 복합 감정에 더해, 대통령 어법을 빌리면 자괴감을 느꼈다. 이러려고 사회학자가 된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대통령의 자격과 정부의 권위를 완전히 상실한 것에 맞서 시민들이 촛불을 드는 것은 당연했다. 시민사회의 차원에서 촛불집회에는 다섯 가지 코드가 담겨 있다. 첫째, ‘시민’ 혁명이다(주체의 측면). 둘째, ‘광장’ 혁명이다(전략의 측면). 셋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혁명이다(방법의 측면). 넷째, 낡은 체제, 즉 ‘앙시앵 레짐 청산’을 요구하는 혁명이다(내용의 측면). 다섯째, 4월혁명과 6월항쟁을 역사적으로 계승한 ‘정치’ 혁명이다(성격의 측면). 혁명이란 국가기초ㆍ경제제도ㆍ사회조직ㆍ문화생활을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을 뜻한다. ‘시민들’이 ‘광장’에서 ‘SNS’로 소통하며 촛불을 들어 외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즉각 퇴진에 더해 ‘정치 혁신’과 ‘낡은 체제 청산’의 혁명이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듯, 엄혹한 독재 정권이든 타락한 사익(私益) 정권이든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분노와 열망을 이길 순 없다. 광화문광장 한구석에서 내가 촛불을 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첫째, 즉각적인 탄핵이 이뤄지고 질서 있는 대선이 치러져야 한다. 머잖아 국회에서 탄핵이 가결되면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제19대 대통령 선거, 광장에서의 촛불집회 등 여러 정치ㆍ사회적 트랙들이 동시에 진행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다. 어떤 상황이 펼쳐지더라도 시민사회의 집단지성과 정치사회의 책임 윤리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당면한 문제들을 슬기롭고 단호하게 대처해 나가야 한다.

둘째, 내년 언젠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은 새 정부의 집권 ‘이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탄핵이 헌법재판소에서 최종 결정이 이뤄진다고 앙시앵 레짐이 모두 청산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시작이다. 대통령 퇴진 너머에 존재하는 저성장ㆍ불평등ㆍ인구절벽ㆍ제4차산업혁명이라는 과제들을 대선이 빠르게 치러지더라도 그냥 지나쳐선 안 된다. 정치 리더들에게 바란다. 광장에서 들려오는, ‘헬조선’으로부터의 과감한 작별을 요구하는, 낡은 ‘대한민국의 리셋’과 새로운 ‘대한민국의 리빌딩’을 원하는, 촛불들이 전하는 바람들을 들어보라. 이 절망의 사태가 희망의 계기가 될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하는 이, 나만은 결코 아닐 것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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