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뉴스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고등학교 이학년 아들조차 요즘은 함께 텔레비전 뉴스를 보곤 한다. 친구들과 다녀온 광화문 촛불집회가 적잖은 감동과 함께 뉴스에 대한 흥미까지 일으킨 것이다.
며칠 전이었다. 연일 새로운 사건이 터지는 가운데 그 날은 청와대에서 홈페이지에 오보를 바로잡는다면서 열 가지 팩트를 공개한 날이었다. 이미 불신이 쌓일 대로 쌓여 그 무슨 말을 해도 ‘팩트’가 아닐 거라고 뒷등으로 듣는 나와 달리 아들 녀석의 눈에 무언가가 띈 모양이었다.
“아빠, 저게 말이 돼? 그 날의 진짜 비극이 오보에 따른 혼란이라니? 그 날의 진짜 비극은 삼백 명 넘는 사람들이 죽은 거잖아.”
세월호 관련하여 청와대에서 게시한 내용이었고 아무리 귓등으로 들어도 하루 종일 반복된 뉴스를 난들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수많은 정치평론가를 비롯하여 그 누구도(나를 포함하여) 아이처럼 ‘진짜 비극’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잠시 아연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일부러 들어가 보니 정확하게 굵고 푸른 글씨체로 ‘이 날의 진짜 비극은 오보에 따른 혼란’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아마 나도 다른 사람들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청와대의 문장을 흘려들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의 지적 역시 단순하고 정확하지 않은가. 문장 이해력이 나보다 더 뛰어날 리 없는 아이가 단박에 잡아낸 것은 다름 아닌 저들의 교언(巧言)이었다. 어찌 감히 오보 따위를 그 날의 진짜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자신들의 무능과 비밀을 감추기 위한 연막의 언어가 분명하지 않은가.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는 내게는 그 해명을 쓴 자의 손끝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 말에 강조점을 찍으면서 아마 득의의 미소가 퍼졌으리라. 그렇다, 언어는 아주 손쉽게 오염되는 어떤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 충격적이었던 기억은 세월호 참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단호한 표정으로 던진 ‘골든타임’이란 말이었다. 배 안의 아이들을 구조하지 못한 시간에 대한 반성과 회한이 아니고는 결코 쓸 수 없는 그 말을 대통령은 버젓이 ‘경제 회생의 골든타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했다. 생존자를 구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온 국민이 애타게 시간을 재던 그 맹골수도의 기억을 경제 운운으로 간단히 바꾸어버리는 언사를 보고 나는 깊이 절망했다. 그것은 도저히 내가 알고 있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다. 정상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자 상식과 인간에 대한 예의가 무언지 모르는 오염된 말이었다.
돌이켜보면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괴롭힌 것 중 하나도 그 ‘말’들이었다. 정권의 상징처럼 외쳐대던 ‘녹색성장’이란 말은 차라리 모멸이었다. 자신들의 정체성과 완전히 반대인 말을 버젓이 가져다 붙이는 걸 보며 우리는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경지에 이른 절정의 사기극을 보는 듯했다. 정권 말기에 스스로 만족한 듯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는 말로 그들은 흡족하게 분탕질 친 오년의 드라마에 용의 눈을 찍었다.
그리고 이어진 현 정권의 언어는 그야말로 혼군의 언어였다. ‘박근혜 번역기’도 돌려보고 풍자와 웃음으로 넘겨보려 했던 것은 비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보고자 했던 안간힘이었다. 그런데 이제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 거짓으로 거짓을 덮는 이 치졸하고 추악한 막장극을 당장 멈추어야 한다. 무엇보다 어린 청소년들 보기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우리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세상이 아무리 형편없어도 지금 이 정도는 아니었다. 역사 속에서 잠시 등장하곤 하는 비정상적 상황일 뿐이다. 그리고 광장에서 외치는 아름다운 외침이 끝내 우리의 언어, 우리의 무기다.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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