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11.24
윤보선(1897~1990)은 가장 존재감 없는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꼽히지만, 빼어난 행정가였고, 주요 갈림길마다 크게 그르지 않은 선택을 했던 정치인이었고, 또 독립운동가였다. 4ㆍ19 직후 민주당 신ㆍ구파가 대통령으로 공동 추대했을 만큼 인품도 그리 유난스럽지 않았다고 한다. 1948년 서울시장으로 6개월 남짓 재임하는 동안 그가 역점을 두고 시행한 신생활운동- 방역ㆍ소독 활성화, 쓰레기 수거 독려, 수세식 변기 보급, 허례허식 타파 등-과 투명 시정(행정 공시) 등은, 훗날 스스로도 관직 생활 중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듯이, 수도 서울을 단시일 내에 혁신하는 큰 계기였다.
조선신학교 여자신학부 전임강사 공덕귀(1911~1997)가 그를 만난 게 그 무렵이었다. 가족을 비롯해 주변 여러 목사들의 권유도 있었겠지만, 30대 중반의 공덕귀에게 50대 초반의 행정가 윤보선은 프린스턴대 유학을 포기해도 좋을 만큼 매력적이었던 듯하다. 둘은 이듬 해 윤보선이 상공부 장관이 된 49년 결혼했다. 윤보선의 대통령 취임과 5ㆍ16 쿠데타, 군사 독재와 유신의 긴 세월 동안, 부부는 각자의 영역에서 민주화와 반독재 투쟁에 헌신했다. 윤보선의 무대가 주로 제도 정치권 안이었다면, 공덕귀의 무대는 더 험한 재야였다.
경남 통영의 가난한 집 7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나 어렵사리 학교를 다니며 일본서 신학을 공부한 공덕귀는 총독부의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고초를 겪으면서도 거부한 이였다. 목회와 교육에 전념하던 그의 삶이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전환하게 된 것도 윤보선과의 인연이 결정적인 계기였을 것이다. 그는 다양한 교회 여성단체 리더로서 여성ㆍ노동자 인권 및 생존권투쟁에 헌신했고, 79년 YH사태 때도 대책위원의 한 명으로 활동하다 연행되기도 했다.
80대의 윤보선이 전두환 군사정권의 국정자문회원으로 참여해 의전용으로 제공된 승용차를 타고 다닐 때, 70대의 공덕귀는 재야ㆍ종교 인사들과 더불어 신군부 광주학살 규탄 서한을 작성해 미 대사관에 전달했다. 그 무렵 부부는 꽤 다투기도 했다지만, 또 남편을 통해 인혁당 관련자 사면ㆍ감형 등을 적극 도모하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남편과 달리 공덕귀는 흠 없이 살다가 1997년 11월 24일 별세했다. 향년 86세.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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