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사망선고 받은 박근혜
계속 버티면 국가명예 실추돼
비박계, 헌재 정의 외면 말아야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를 시작한 동기가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라고 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김재원 당시 대변인이 한 말이다.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게 아니라 개인의 한을 풀기 위해 정치를 한다는 이 고백은 박 대통령의 속내를 그 어떤 표현보다 솔직하게 드러냈다.
박 대통령은 ‘아버지 명예 회복’을 한 번도 부인하지 않았다. 그해 9월 “5ㆍ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으로 상처와 피해를 입은 분들과 그 가족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아버지 시대의 역사를 두둔해서 빚어진 논란을 희석하고 눈앞의 대선에서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 내놓은 마음에 없는 사과였다.
정치 목적이 남달랐던 박근혜 대통령은 40년의 시간을 거슬러 아버지 시대의 정치를 21세기에 이식했다. 아버지 박정희가 미중 수교와 베트남 패망을 이용해 한국을 병영국가로 만들었듯 딸 박근혜는 북핵 문제에만 매달리며 다른 일은 팽개쳤다. 이견과 반대를 용납하지 않았던 아버지처럼 딸은 소통을 거부하고 불통의 길을 달렸다. 박정희가 국민교육헌장과 국정교과서로 학생들의 정신을 통제하려 했듯 박근혜는 시대착오적 교과서 국정화로 친일과 쿠데타를 산업화의 결단으로 미화할 태세다.
요즘 박근혜는 박정희와 결정적으로 닮은 점을 드러내고 있다. 권력을 절대 내려놓지 않겠다는 무서운 집착증이다. 박정희는 부산과 마산의 민중이 이제 대통령 그만 하라고 외칠 때 100만~200만명 정도는 죽여도 된다는 차지철의 말에 따라 강경하게 대응했다.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설 수는 없다는 지독한 권력욕의 결과가 무엇인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이 사건의 교훈은 권력은 결코 국민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가 얻은 교훈은 마지막 순간까지 권력을 내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 같다.
거리에는 국가 기능과 국가 예산을 개인 이익을 위해 동원한 대통령에게 하루빨리 물러나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나이 어린 초등학생과 평생 보수정당을 지지한 노인들까지 대통령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지금 당장 퇴진하라고 요구한다. 생명체 박근혜는 살아 있어도 정치인 박근혜는 이미 죽었다는 사실은 광장에 잠시만 서 있어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박근혜는 자신에게 내려진 정치적 사망선고를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고 내뱉으며 제 맘대로 한 아버지처럼 스스로는 절대 물러나지 않을 테니 할 수 있으면 해 보라며 자신을 탄핵하라고 큰소리친다. 법무부 장관과 민정수석이 사표를 내도 흔들릴 사람이 아니다.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 피의자 신분이 된 그가 이리도 당당한 것은 탄핵 소추안의 국회 통과와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에 대한 정치적 계산의 결과다. 비박계 의원들의 기회주의적 속성과 헌법재판소의 보수 성향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기는 하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 살면 대한민국이 죽는다는 사실이다. 현대 문명국가에서 권력자가 국민과 싸우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잘못을 저지르고도 버젓이 자리를 지킨다면 죽은 나라나 마찬가지다. 명예가 짓밟힌 나라에서는 정의와 희망을 입에 올릴 수 없다.
16, 17년 전 서울에서 만난 미얀마 청년들은 “한국은 민주화에 성공한 나라”라고 부러워했었다. 제 나라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군부에 쫓겨 피신한 이들은 왜 하필 한국으로 왔느냐는 질문에 “군사정권과 싸워 직선제를 쟁취하고 민주화를 이룬 나라이기 때문”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그렇게 누구에겐가는 희망의 땅이었던 이 나라가 국민의 뜻을 거스른 지도자를 어찌하지 못한다면 조롱거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이룬 유일한 국가라고 자부심을 보이는 보수세력도 같은 걱정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세계에는 지도자 탄핵 사례가 적지 않다. 그중에는 정치적 음모가 작용한 것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절대로 물러나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지금은 탄핵이 정의다. 비박계든 헌법재판소든 정의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역사가 이 시대를 지켜보고 있다.
박광희 논설위원 kh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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