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51명. 정세랑 작가의 장편소설 ‘피프티피플’(창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다. 충분한 설명이기도 하다. 소설가가 개인의 내면이라는 매력적인 서사를 버리고 인물의 머릿수를 택했을 땐, 그 의도 자체가 주제라 할 수 있다. 작가는 22일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전철에 끼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뻗은 수많은 손” 같은 이야기라고 말했다.
‘피프티피플’은 1,003대의 TV 모니터가 탑을 이룬 백남준의 ‘다다익선’을 떠올리게 한다. 한 화면에서 어떤 인물의 이야기가 상영된 뒤 꺼지면 옆의 화면에서 다른 인물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식이다. 앞선 이야기에서 조연으로 등장했던 인물이 다음 이야기에선 주연이 되고, 그 주연은 다시 다른 이야기에서 엑스트라로 나온다.
“주인공에게 집중되는 권력을 분산시키고 싶었달까요(웃음). 소설은 편집과 집중의 장르잖아요. 그걸 무너뜨리면 어떻게 되나 실험해보고 싶었어요.”
등장인물들은 평범하다. 주부, 의사, 간호사, 경비원, 사서, 카페 주인, 타투이스트, 시인. 작가의 시선이 각별히 머무는 것은 이들의 직업이다. 외과의사는 “테이크아웃 커피에 빨대 꽂듯이” 부드럽게 기도에 관을 삽입하고, 마취과의사는 환자의 신경이 눌리지 않도록 몸 아래 꼼꼼히 스펀지를 받친다. 아파트 분양상담사들의 머리는 하루 종일 볼륨이 꺼지지 않고, 주부는 매일 먼지, 곰팡이, 벌레와 벌이는 전쟁에서 국방부 장관 같은 자세로 임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톱니바퀴처럼 착착 물려 사회를 가동시키는 이 건전하고 건조한 풍경은 묘하게 감동적이다. 지금 우리가 상실한 무엇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전 사람의 사적인 면보다 공적인 면에 더 끌려요. 자기가 맡은 자리의 윤리를 고민하고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사람들이요. 하지만 우리 사회는 공적 자아에 대한 인식이 너무 부족해요. 재작년 세월호 참사부터 지금의 국정 비리까지, 공적인 자리에서 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지경까지 온 것 같아요.”
작가는 평소에도 사건ㆍ사고 기사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관심에 머무를 수 없게 됐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 강남역 살인사건, 문화계 성폭력 고발 사건. 최근 2, 3년간의 한국 사회를 보며 그는 “이대로라면 다음 세대의 존립이 불가능하겠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지금까지 예민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불편한 것으로 여겨져 왔죠. 올해는 그들이 유난히 예민했던 게 아니란 사실이 밝혀진 해인 것 같아요. 드러난 건 빙산의 일각이겠지만 여기서부터 희망이 시작될 거라고 봅니다.”
작가가 말하는 ‘바람직한 인간’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뜨거운 심장의 소유자가 아니다. 상습적으로 레지던트들의 뺨을 날리는 의사에게 “안됩니다”라고 말하는 새파란 인턴, 비계가 무너진 공사현장에서 정직하게 자신의 책임을 돌아보는 관리감독, 피바다가 된 응급실에서 귀에 벌이 들어간 채로 두 시간 넘게 기다리는 중년의 명퇴자.
책의 마지막에서 이들은 영화를 보기 위해 한 극장에 모인다. 물론 서로 모른 채다. 이 건물에 불이 난다. 물탱크를 열자는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은 공구를 찾아내 파이프를 분리하고 호스로 연장한 뒤 불길을 제압한다. 모두가 조금씩 손을 보탠다. 결국 “아무도 죽지 않았다.” 현실의 우리는 결코 가질 수 없었던 문장이다.
“공기 중에서 폭력이 느껴지지 않는 사회를 꿈꿔요. 우린 서로에게 더 친절할 수 있는데 손해 볼까 두려워서 ‘친절의 최대 가능성’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 책이 멀리 있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가벼운 손짓처럼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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