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웅의 출세작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정영(지난해 11월 명동예술극장, 올해 10월 중국 국립화극원), 정의신의 대표작 ‘야끼니꾸 드래곤’의 용길(3월 일본 도쿄신국립극장). 한중일 무대에서 차례로 주역을 맡으며 지난 해 각종 연극상을 휩쓴, 종종 영화에도 얼굴을 내민 데뷔 21년차 배우 하성광(46)은 요즘 이 또래 영화계 물오른 중년들이 그러하듯 하염없이 평범한 몰골의, 그러나 무대에선 어김없이 발산하는 마성의 매력으로 공연계 대세로 떠올랐다. 연륜이 보증하는 연기력, 1952년생 기국서부터 1973년생 김재엽까지 내로라하는 다혈질 연출가들과 합을 맞춰온 노련미, 최근 몇 년 간 이어진 작품복과 상복, 이 모든 ‘우주의 기운’이 빚어낸 자신감. 지금 배우 하성광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연극계 아재파탈’이다.
그가 선택한 차기작은 12월 11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초연하는 2인극 ‘고모를 찾습니다’. 탤런트 정영숙과 함께 출연하는 이 작품에서 하성광은 30년 만에 고모를 찾아온 성격장애인 켐프 역을 맡았다.
“글쎄… ‘작품 한번 해요’ 하는 인사는 많이 받았는데 대놓고 섭외 연락 받은 건 이 작품이랑 두 편이에요.”
하성광은 21일 전막 리허설이 끝난 직후 예술의전당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러브콜이 줄을 잇는다’는 항간의 소문에 이렇게 해명하면서 “저 까다롭지 않다. 작품이 별로면 연출이 있고, 연출이 아쉬우면 작품이 있더라”고 덧붙였다. “처음 대본 봤을 때 (켐프가) 매력 있더라고요. 대사가 너무 많아서 겁도 났는데 ‘해볼 만하겠다’ 도전의식이 생겼죠.”
캐나다 극작가 모리스 패니치의 대표작 ‘고모를 찾습니다’는 성격 장애를 앓는 켐프가 연락 끊긴지 30년 만에 고모 그레이스로부터 “죽어간다”는 편지를 700통 받고 간호하러 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곧 죽는다는 고모의 선언과 달리 임종은 1년을 넘기게 되고 켐프는 “(장례는)화장으로 해드려요?” “장기는 어떻게 할까요?” “고모 물건들을 경매로 팔아 장례 비용을 만들어야겠어요” 같은 남근기 단계의 질문을 던지며 자기고백을 덧붙인다. 하성광은 시종 어린이 같은 하이톤의 목소리와 어눌한 몸짓으로 이전 자신의 특장으로 꼽힌 ‘소시민 연기’에서 변신을 꾀한다.
또래 ‘대세 아재’들이 그러하듯 전형적인 대기만성형인 하성광이 연극을 시작한 건 군 제대 후 1990년대 중반 무렵. “평범한 회사원 대신 재미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는 준비된 답변을 내놓던 그는 ‘무슨 자신감으로 연극인 중에서도 배우를 꿈꿨냐’는 질문에 한참을 머뭇거리다 “무의식적인 욕망이 있었나 보다”고 말했다. “오래 전에 고등학교 때 생활기록부를 뗀 적이 있어요. 장래희망을 3년 내내 ‘탤런트’라고 썼더라고요. 정말 기억이 안 나는데(웃음) ‘내가 저런 꿈이 있었나?’ 싶었죠. 아마 배우 복장, 연기 이런 게 어릴 때부터 멋있어 보였나 봐요.”
그 시절 연극쟁이들이 그러하듯 한 극단에 입단해 포스터 붙이기부터 시작했건만 문제는 정말 포스터만 3년을 붙이고 그대로 쫓겨났던 것. “그때 알았죠. 어영부영 살아서는 안 되는구나. 이런다고 무대에 세워주는 게 아니었구나.”
이후 한양레퍼토리 ‘해피엔드’에서 대사 없는 노숙자 단역으로 시작해 차츰 배역을 넓혔던 그가 제대로 된 주역을 맡은 건 데뷔 10년이 지난 2005년 김아라 연출의 ‘덫-햄릿에 대한 명상’에서다. “그때 연기를 못했어요. ‘역할의 크기와 연기 수준은 아무 관계가 없구나’ 이런 걸 느꼈죠. 만족스럽지 못한 작품이었고 그래서 그 다음 작품, 다음 역할은 다 햄릿이에요.” 요즘의 ‘대세’를 있게 한 터닝 포인트가 뭐였냐는 질문에 그는 “‘덫’ 이후 모든 작품이 터닝 포인트”라고 말했다.
‘관객모독’부터 자타가 공인하는 출세작 ‘조씨고아’까지 수많은 작품 중 지금 하성광에게 가장 중요한 작품은 단연 ‘고모를 찾습니다’일 터. 그는 “다시 보고 싶은 작품, 그래서 ‘조씨고아’나 ‘야끼니꾸’처럼 ‘이 극장의 주요 레퍼토리가 됐으면’ 하는 욕심이 가는 작품”이라며 “따뜻한 작품, 기다려지는 작품으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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