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오후 12시쯤 미국 대선결과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당일 오전까지만 해도 뉴욕타임즈가 힐러리 클린턴의 승률을 90% 이상으로 점치고 있었던 상황인 만큼, 대부분의 사람들은 클린턴의 당선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습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 당선인이 됐죠. 후보 시절부터 ‘Great America(위대한 미국)’를 외치며 미국의 이익에 반대되는 것들을 철저히 차단하겠다고 공언했었던 만큼, 우리나라를 포함해 미국과의 교류가 많은 나라들은 바짝 긴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도리어 안도의 한숨을 내쉰 곳도 있습니다. 바로 농림·수산 업계입니다.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최대 통상업적으로 손꼽히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사실상 폐기 수순을 밟게 됐기 때문입니다. TPP는 미국과 일본 등 아시아·태평양의 12개국이 참여하는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 입니다. 이는 ‘예외 없는 관세 철폐’를 추구하며 양자FTA 이상으로 높은 수준의 포괄적 자유화를 목표로 합니다. 우리나라는 1차 가입 논의에서는 빠졌지만, TPP 공식 출범 후 추가 가입을 모색하기 위해 2013년 11월 TPP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뒤 당사국들과 예비 양자협의를 진행하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농어업인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TPP에 가입하면 현재 우리 정부가 설정한 쌀 관세화율 513%를 대폭 낮추거나, 자국산 수입 쿼터를 늘릴 것을 요구 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수입을 금지하고 있는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추가개방 또한 강하게 압박할 수 있습니다. 수산업계에서도 TPP가 비준되면 어업용 면세유 지급이 어려워질 수 있어 어업인들의 반발이 일었습니다. 어업용 면세유 감면액은 연간 6,800억원 정도인데 갑작스레 이를 없애버리면 당장 어업소득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정부가 골머리를 앓으며 보조금 개편 용역을 추진하는 등 다방면으로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죠.
이런 와중에 트럼프의 당선으로 TPP비준이 당분간 무산되자 정부와 업계가 한시름 놓게 된 겁니다. 트럼프는 경선 기간 내내 TPP를 더러 “미국 역사상 최악의 협정” “끔찍한 거래”라며 강하게 비판하며 TPP 탈퇴를 공언했습니다. 트럼프가 당선돼도 오바마가 임기 막판에 ‘레임덕 회기’를 이용해 TPP를 비준시키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대선 이튿날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가 “올해는 TPP를 안건으로 삼지 않을 것”이라며 그러한 가능성을 차단했습니다.
TPP 발효가 무산되거나 지연되면 후발 참여국으로서의 불리한 점을 축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관련 산업의 충격 또한 줄일 수 있어 우리나라에는 긍정적입니다. 또 TPP에 가입했을 때 가장 민감한 문제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식품동식물검역규제(SPS) 협정의 이행 관련 대응방안 또한 시간을 두고 꼼꼼하게 마련할 수 있습니다. SPS협정은 식품 및 동식물 검역규제에 관한 협정으로, 식품첨가물, 오염물질 등의 기준치와 규격을 국제적으로 정하고 이를 통화할 경우 식품 교역을 거부할 수 없도록 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심만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일각에선 트럼프가 후보자 시절 때와는 달리 대내외의 거센 압력에 못 이겨 입장을 변경한 후 TPP 재협상으로 방향을 잡을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또 “당장은 TPP가 지연 또는 무산되더라도 현재 공개된 TPP 협정상의 규범은 향후 국제질서의 기준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국내 관련 제도들을 TPP규범에 맞게 합치시켜야 한다”(이상현 농촌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는 지적도 나옵니다. 트럼프가 제시한 공약들이 정책화하는 과정을 예의주시하며 시나리오별 대응방안을 촘촘하게 마련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세종=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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