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고추밭을 매다가
엄마얏! 지렁이
명아주 뿌리에 끌려 나와
몸부림치는 지렁이
배춧잎을 솎아주다
엄마야, 벌레 좀 봐!
고갱이에 누워 자다
몸을 꼬는 배추벌레
지렁이랑 나랑
누가 더 놀랐을까
배추벌레랑 나랑
누가 더 놀랐을까
* 도종환 동시집 ‘누가 더 놀랐을까’(실천문학사, 2008)
지렁이나 벌레를 보고 놀란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비 내리고 난 뒤 길 위에 늘어져 있는 지렁이나 마트에서 사 온 야채 속에 천연덕스럽게 엎어져 있는 애벌레를 보고, 비명까지 지르지는 않았더라도 덜컹 놀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도시가 구석구석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덮이고 야채와 과일도 온실에서 살충제를 맞고 자라니 점점 놀랄 일은 없어진다. 박수 칠 일이 아니다.
도종환의 동시 ‘누가 더 놀랐을까’는 시인이 국회의원이 되기 전 속리산 자락 산방(山房)에 머물 때 쓴 작품이다. “엄마얏!”과 “엄마야”라는 감탄사는 아이가 놀라서 엄마를 부르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아이든 어른이든 놀라서 무의식적으로 지르는 비명으로 읽힌다. 땅속에서 갑작스럽게 공중으로 끌려 나온 지렁이, 잎 속에 숨어 자다 활짝 헤집어져 노출된 배추벌레. 사람도 놀랐지만 날벼락 같은 상황에 이 생명체들은 더 놀랐을 것이다. 화자의 놀람이 자신의 놀람으로 끝나지 않고 지렁이와 배추벌레의 처지에 생각이 미침으로써 동시의 씨앗이 되고, 그러자 자연과 사람이 만나는 풍경이 일방적인 점령이 아니라 공존의 공간이 된다. 자고 일어나면 고춧모가 자라는 고추밭으로 나가 풀을 매고, 배추를 심어 쑥쑥 자란 배춧잎을 솎아주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삶이 시의 배경이 되고 있기에 놀람도 생활의 자그마한 축복인 듯싶다.
누가 더 놀랐을까, 요즘 누가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나야, 나. 항복!’ 하고 두 손 들어야겠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 대통령 당선. 트럼프가 더 놀랐을까, 미국 국민이 더 놀랐을까. 중고등 학생까지 거리로 나와 대통령 퇴진을 한목소리로 외친 100만 촛불 민심. 대통령이 더 놀랐을까, 야당이 더 놀랐을까. 이런 경악도 본편을 앞둔 서곡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나는 머리털이 곤두선다.
김이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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