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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푼밥상, 제주 맛의 원형을 담다

입력
2016.11.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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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맛집이라는 곳들을 다니면서, 머릿속에선 항상 의문 하나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내가 맛 본 것들이 정말 제주의 맛인가?’ 라는 의문이었다. 물론 맛이란 시대마다 다르고 시간의 흐름 위에서 완고할 수 없다. 그리고, 내 입은 정말 맛있게 먹었다 만족하고 있었다. ‘맛있으면 그만!’이라는 단정은 맛의 주관성 아래 힘을 얻는다. 그렇게, 제주에 입도하면서 시작된 맛기행은 나름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지금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의문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제주 본연의 맛’이라는 말은 많아도, 나는 제주 본연의 맛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정말 맛있는가, 맛있음을 떠나 지금의 맛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항상 궁금했다. 짐작할 수 있는 건 단지 제주의 자연과 섬에서의 삶에서였다. 들판과 바다에서 나는 신선한 재료 그대로 가져다 먹었다는 것, 그것에서 이곳의 맛을 짐작하고 육지음식과의 확연한 차이는 거기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었다.

물질 나갔던 해녀는 점심 차리러 잠시 집에 들른다. 이것저것 차릴 시간도 없이 텃밭의 상추 깻잎 배춧잎 고추 따서 된장 한 수저 푹 떠서 옆에 놓았을 것이다. 잘 삭은 자리젓 조금과 물질하며 조금 가져온 갯거리 대충 손질하여 올리고 반찬 두어 개 더한다. 커다란 낭푼에 보리밥 한아름 담아내고 거기에 가족 수대로 수저 꽂아 상을 낸다. 이것이 낭푼밥상이다. 제주의 고난한 삶이 담긴 낭푼밥상과, 몸 제피 양애 등등의 섬 먹거리가 만드는 맛의 풍경은 오랜 세월을 이 섬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면 상상하기 힘들다.

낭푼밥상은 이름 그대로 하나의 공간이 되었다. 제주 향토음식의 재해석이라는 큰 틀 아래 제주 향토음식 연구가 김지순 명인과 가족들이 유수암 산기슭에 차분한 공간을 만든 것이다. 제주에서 난 재료들로 예전의 모습에 가깝게 그리고 정갈하게, 조금씩 코스로 내놓는 요리엔 이야기가 있다. 예를 들어 제주 토종 참기름을 넣은 독새기(달걀) 반숙은 집에 놀러온 반가운 손님에게 맨 처음 내놓았던 요리였다. 빙떡의 슴슴함은 짭짤한 옥돔구이와 함께 먹어야 잘 어울린다는 사실도 여기에서 알게 되었다. 두 장이 꼭 붙어 나오는 송애기떡은 떨어지지 말라는 부부의 금슬을 의미한다고 한다.

독새기 반숙으로 시작해서 하나하나 정갈하고 의미를 담은 요리들이 나올 때마다, 차분함이 배고픔을 앞선다. 조금은 길 수도 있는 한 시간 반 동안의 요리는, 음식이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즐겨야 한다는 망각된 사실을 일깨워준다. 오랜 전식의 과정이 끝날 때 즈음이면 배는 살짝 부르지만, 본식인 낭푼밥상이 차려지면 손은 다시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움직여진다. 양애무침, 고구마줄기 김치, 제피된장과 자리젓갈 등등의 소소하고 당연했을 반찬들은 다시 태어난 듯 새롭다. 새콤하고 달달한 후식은 깔끔한 마무리와 함께 만족스럽고 풍성한 만찬이 끝났음을 넌지시 알린다. 여기에 순서마다 더하는 섬 안의 전통주가 더해지면 만족은 배가 된다.

향토음식의 재해석은 무거운 작업이다. 옛 과거를 살려내는 작업이란, 또 다른 호불호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옛 과거를 살려내는 작업의 가치’와 별개이기에 더욱 버겁다. 그래서, 이 섬에서 태어난 젊은 친구들은 어릴 적 맛보던 그때 그 맛이라는 다소 덤덤한 반응을 보이고, 연세 지긋한 분들은 오래 전의 향수를 일깨우는 추억의 맛에 온화한 만족을 표한다. 그리고, 이 섬에 들어온 이주민과 여행자들에게 그 맛은, 제주의 자연과 삶이 녹아든 맛의 경험이자 기준이 되어준다. 그래서 나는, 낭푼밥상에서 오래도록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의문 하나를 덜어냈다. 제주의 수많은 맛과 맛들의 중심에 존재하는 어떤 원형 또는 기준, 그것을 낭푼밥상에서 답에 가장 가까운 형태로 만난 것이다.

보편의 자연과 삶이 녹아 든 평범한 밥상에 재해석의 가치를 얹어 두 손 무겁게 받아 드는 일은 조금 서글프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빠른 시간에 옛것들과 너무 멀리 떨어져왔고 그것은 그대로 가볍지 않은 가치가 되었다. 맛은 맛대로 편하게 즐기면 그만이지만, 가치의 경험은 항상 그 만큼의 무게를 담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푼밥상은 제주라는 시공간 안에서 한 번쯤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다. 중구난방의 맛이 난무하는 시대에, 삶과 자연이 무리 없이 고스란히 배인 과거 본연에 가까운 맛이 그 곳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제주의 맛을 차분하게 잠재울 손이 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전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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