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있는 건 귀한 줄 모르고, 늘 보던 풍경은 그 가치를 제대로 알기 어렵다. 세상만물의 이치를 논하는 대학자에게도 등잔 밑은 어두웠나 보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퇴계 이황은 “어려서 부형을 따라 책상을 짊어지고 오가며 이 산에서 글을 읽었던 것이 얼마인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정작 풍기군수 주세붕의 유람기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1544년)’을 읽고서야 청량산의 가치를 다시 보게 됐다고 고백한다.
“높아지고 깊어져 이윽고 형체를 이룬 것이 그 몇 천만 겁인지 알지 못하거늘, 하늘이 그 빼어난 경치를 감추고 땅은 그 기이함을 숨겼다가 곧 선생(주세붕)의 글을 기다리고서야 드러났으니, 어찌 이 산의 특별한 만남이 아니겠는가?”(주세붕의 ‘유청량산록’ 뒤에 쓴 발문, 周景遊遊淸凉山錄後跋, 1552년)
▦절경을 한눈에 보려면 축융봉으로
안동에서 태백으로 연결되는 35번 국도를 거슬러 달리다 도산서원 지나 가송리에 접어들면 고만고만한 산을 에두르던 풍경이 갑자기 툭 트인다. 낙동강 건너편으로 우람한 산세가 시선을 위로 이끈다. 이곳부터 봉화 명호면 소재지까지 약 10km 구간은 청량산과 낙동강이 어우러져 빚은 절경이 이어진다.
청량산은 둘레가 100리에 불과해 지경이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해발 800m가 넘는 12개의 바위 봉우리가 그림처럼 연결돼 소금강에 비유된다. 백두대간 큰 산줄기에서 살짝 비껴 숨겨진 보물 같은 존재다. 주세붕도 “아래에서 우러러보면 다만 깎아지른 듯한 절벽만 보일 뿐 그 위에 또 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절 뒤는 모두 절벽이고 절 앞은 모두 대(臺)이다”라고 묘사했다.
현재 청량사와 부속건물인 응진전만 남았지만, 고려시대 청량산은 연대사를 중심으로 바위 절벽을 따라 30여 개의 암자를 품은 불교의 요람이었다. 유교국가인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원효 문수 보살 등 불교 색이 강했던 봉우리를 주세붕이 중국 주자의 무이산에 비유한 이름으로 바꿔 ‘육육봉’ 12봉우리로 정착되었다. 이후 청량정사(淸凉精舍)를 중심으로 퇴계의 학맥을 잇는 유학의 성지로 발전했다. 이외에 신라시대 서예가 김생과 문장가 최치원의 자취와 관련한 유적도 김생굴, 김생암, 치원대, 치원암 등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청량산 12봉우리 중 11개는 현재 명호에서 재산으로 넘어가는 도로를 중심으로 왼편에, 1개 봉우리는 오른편에 위치한다. 그래서 등산로도 왼편 청량사와 응진전을 중심으로 각 봉우리와 능선을 연결한다. 최근에는 선학봉과 자란봉 사이에 하늘다리까지 건설해 등산객들은 주로 청량사를 거치는 코스로 오른다.
반면 홀로 떨어진 축융봉(845m)에 오르면 11개 봉우리가 병풍처럼 연결된 청량산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왼편 끝자락 낙동강에서 치솟은 장인봉에서부터 가장 오른쪽 탁립봉까지, 또 그 사이 바위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둥지를 튼 절간 건물이 그대로 한 폭의 동양화다.
등산을 시작하는 산성입구에서부터 축융봉 정상까지는 2km에 불과하지만, 체력소모가 만만찮다. 정상 바로 아래까지 쉼 없이 가파른 오르막이다. 청량사 자락에 불교와 유교 유적이 많은 반면, 축융봉에는 고려 공민왕과 민간신앙 유적이 산재해 있다. 산중턱에는 정월보름과 백중(음력 7월 15일)에 제를 올리는 공민왕당이 자리잡고 있고, 등산로 일부 구간은 당시 축조한 것으로 추정하는 공민왕산성을 걷는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복주(안동)로 피신한 건 사실이지만 청량산에 머물렀다는 구체적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군법을 어긴 병사를 처형했다는 밀성대, 다섯 마리 말이 끄는 대로였다는 오마도(五馬道) 등의 유적이 남아 청량산과 공민왕 이야기는 설화와 역사 사이를 오간다.
▦우람한 뒷모습 보려면 관창리 산마을로
축융봉 정상에서 보는 또 하나의 풍경은 청량산 맞은편 만리산 자락을 파고든 관창리 마을이다. 청량산이 자연이 빚은 절경이라면 관창리는 인간이 만든 풍경이다. 산비탈을 타고 이어진 고랭지채소밭과 사과나무 과수원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전망 좋은 카페가 있다는 소문에 길이 끝나는 곳까지 차를 몰았다. 수직에 가까운 경사를 오르고, 과수원 길을 지나는 사이 도로는 차 한대 겨우 지날 만큼 좁아졌다. 맞은 편에서 오는 차에 길을 내주기 위해 후진하다가 뒷바퀴 한쪽이 수로에 빠졌다. 후회막급인데 뒤따라 오던 차에서 내린 일행의 도움으로 다행히 어렵지 않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드디어 도로의 끝, 펜션 겸 카페 ‘오렌지 꽃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앞마당은 한국관광공사에서 지정한 ‘사진찍기 좋은 녹색 명소’다. 축융봉에서 보는 아기자기하고 여성스런 앞모습과 달리, 청량산의 뒷모습은 탄탄한 몸매를 자랑하는 남성처럼 우람하고 늠름하다. 산세에 비해 가늘어 보이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힘들게 지나온 관창마을에 가을이 진하게 내려앉았다. 긴장 속에 투덜대던 불평불만이 순식간에 녹아 내린다.
2층 카페의 넓은 유리창은 이 풍경을 대형 액자나 스크린에 담은 것처럼 비현실적이다. 창가 자리는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왕위’터이자 행운을 가져다 주는 ‘대박’자리로 입 소문이 나 주말이면 1시간씩 기다리기도 한다. 펜션 주인장 김두한씨는 “한 번도 안 와본 사람은 많아도, 한 번만 와본 사람은 없다”며, 우연히 자리잡은 곳에서 경치를 팔아먹는 ‘봉이 김선달’이 된 자신에게도 이 터가 왕의 자리가 아니겠냐고 해석했다.
애초 카페는 펜션에 묵는 사람들을 위한 휴식공간이었다. 주인장이 자리에 있을 때는 제철에 나는 꽃차를 대접하지만 그렇지 않을 땐 무인 카페로 운영한다. 당연히 무료였는데 방문객들이 오히려 부담스러워해 지금은 한 사람당 5,000원 정도를 받는다. 물론 내지 않아도 그만이다. 산길 운전이 서툴다면 걸어서 가는 방법도 있다. 강변의 관창폭포 주차장에 차를 대고 ‘들꽃쉼터’ 이정표를 따라 약 1.3km를 등산하면 된다. 역시 경사가 가팔라 30분은 잡아야 한다.
청량산 구간을 포함해 안동 도산서원에서 낙동강을 따라 봉화 현동까지 이어지는 35번 국도는 2011년 미슐랭가이드에서 별점 하나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눈 밝은 현인들이 진작에 알아본 풍광을 세계적 여행안내서가 뒤늦게 인정했다고 들뜨는 모습이 한편으론 씁쓸하다. 아름다움은 늘 그곳에 있었는데.
▦청량산 가는 길에
봉화 춘양면 서벽리에 들어선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이 지난 9월 임시 개원했다. 관람객들이 둘러볼 수 있는 중점조성지역만 축구장 300개 크기에 달하는 206헥타르이고, 문수산 옥석산 구룡산 등 해발 1,200m가 넘는 고산과 연결된 산림보존지구 전체면적은 5,179헥타르(약 1,500만평)로 동양 최대 규모다. 청량산에서 약 40km 떨어져 있다.
내년 상반기 정식 개원에 앞서 현재 무료로 시범 운영 중이다. 대표 프로그램은 전기관람차를 타고 이동해 낙엽송 숲과 잣나무 치유의 숲길을 걸어보는 프로그램. 전문해설사가 동행해 1시간 가량 진행한다. 전기차는 수목원 홈페이지에서 미리 예약해야 하며, 자율관람은 제한이 없다. 전기관람차도 12월부터는 예약 없이 기상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영한다. 겨울철에는 손맛사지 명상, 나무도마 만들기, 천연가습식물 가드닝 등 실내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봉화여행에서 먹어봐야 할 대표 음식은 돼지숯불구이. 참나무 숯이 아닌 솔 숯을 이용해 적당히 구운 돼지고기에 솔잎을 얹은 후 몇 차례 더 구워 솔 향을 입힌다. 가격은 1인분(200g)에 돼지숯불구이는 9,000원, 돼지양념숯불구이는 1만원 선. 청량산에서 약 20km 거리의 봉성면사무소 일대에 6개 돼지숯불구이 식당이 영업 중이다.
봉화=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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