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소소함을 그리는 작가. 소설가 윤성희를 따라 다니는 수식 중 하나다. 그의 일상 스케치 능력은 확실히 독보적이다. 방바닥 위에서 데워진 잠바, 비 오는 날의 젖은 양말과 퉁퉁 불은 발가락, 천혜향 껍질을 까다가 주황색으로 물든 손톱 밑. 그가 일깨우지 못할 일상의 감각 같은 건 없을 것 같다.
한 해 동안 출간된 가장 뛰어난 소설에 주는 제49회 한국일보문학상에 윤성희의 다섯 번째 소설집 ‘베개를 베다’가 선정됐다. 한국일보 사옥에서 만난 작가에게 그를 오래 따라 다닌 수식에 대해 반론할 기회를 주었다.
“동의해요. 그런데 그런 얘기 하도 많이 들으니까 저도 속는 것 같아요. 아, 나 되게 소소한 가봐. 그런데 제가 하고 싶은 건 그냥 일상을 잘 그리는 거예요. 일상이 우리를 어떻게 지탱하는지, 하찮은 것들이 우리를 어떻게 떠받치는지를요.”
‘베개를 베다’에 담긴 10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크고 작은 상실을 겪은 이들이다. 자식이 죽었을 수도 있고 사랑하는 이가 배신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상실의 구체적인 내용은 그보다 훨씬 자세하고 방대한 일상 스케치에 밀려 정체를 드러낼 기회가 없다. 책에 실린 단편 ‘못생겼다고 말해줘’의 주인공에겐 한때 쌍둥이 언니가 있었다. 언니의 부재와 그 원인은 형부가 장모에게 언니의 필체를 흉내 내 언니의 이름으로 보내는 가짜 편지를 통해 짐작만 할 뿐이다. 앞집 아저씨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매일 옥상에서 국민체조를 하던 아저씨 대신 이제 아주머니가 체조를 한다는 것, 그리고 빨랫줄에 널린 팬티와 수건이 조금 많다는 것을 통해 그 집에 닥친 불행을 추측할 뿐이다.
남겨진 이들의 일상을 채우는 것은 주로 먹는 일이다. 주인공과 엄마는 주말마다 메뉴를 바꿔가며 오리백숙, 전복 삼계탕, 누룽지 삼계탕, 추어 삼계탕, 칼국수를 먹어 치운다. 참척과 식욕은 비극의 관전자들에게 허용되지 않는 풍경이지만, 작가는 피 냄새 대신 전 부치는 기름 냄새로 지면을 꽉 채운다. 눈물의 짠 맛 대신 맥주의 시큼함과 김의 짭조름함에 열렬히 집중한다. 윤성희 특유의 그로테스크다.
“자식이 죽어도 밥은 먹어야 하잖아요.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인간은 타인의 아픔을 백 퍼센트 공감할 수 없고,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일도 몇 년 후엔 잊혀져요. 저는 이게 굉장히 슬프고 잔인한 삶의 이면이라고 생각해요. 상실 이후에 아무렇지도 않게 삶이 이어지는 걸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제 나름의 위로 방식이에요.”
윤성희 작가는 1999년 등단했다. 작가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믿은 열혈 문청들과 달리 그는 독자로 남아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야심 없는 문창과 학생이었다. 그러나 신춘문예 에 도전한 첫 회에 덜컥 당선을 해버렸고 그대로 길이 정해졌다. 전업 소설가의 길을 걸은 지 올해로 17년째다.
“어릴 때 쓰는 글은 다 일인칭이잖아요. 나는 슬펐다, 나는 기뻤다. 그런데 소설은 기본적으로 내가 아닌 남의 이야기라 타인의 감정을 상상해야 해요. 이게 저를 매료시킨 것 같아요.”
꾸준히 쓴 작품들이 쌓여 지금까지 소설집 5권, 장편소설 1권을 냈다. 장편보다 단편에 ‘편식’하는 이유 중 하나로 그는 “변화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좀더 자유롭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단편집을 쭉 펴놓고 보면 어쩔 수 없이 일련의 발자취들이 보인다. 이번 책에 유난히 죽음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최근의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작가는, 그러나 요즘 들어 ‘미성숙한 태도를 그리는 것만으로 충분할까’란 고민이 든다고 했다.
그가 앞으로 쓸 소설들과 가장 가깝다고 말한 ‘가볍게 하는 말’에는 노인이 된 큰 아버지와 아버지, 작은 아버지가 칠순 잔치에서 끌어 안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만하면 우리 집안도 성공한 거 아니겠냐”며 우는 남자들을 향해 막내 여동생인 고모가 말한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부끄러운 게 뭔지도 몰라, 오빠들은.”
고모가 일갈한 이유도 역시 분명치 않다. 그러나 고모의 아들이 손자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는 것, 고모는 갈빗집에서 15년 간 일하느라 손목이 망가져 손자를 안아줄 수 없다는 것, 오빠들의 칠순 잔치가 호텔에서 열렸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오빠들이 ‘성공한 집안’의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어떤 비극을 밟고 지나갔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고모는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친구의 아들에게 “기운 내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고 말한 것을 두고두고 부끄러워한다. 그리고 손자에게 말한다. “그건 부끄러운 말이란다. 그건 예의가 없는 말이란다.”
작가는 “나만 잘 산다고 해서, 집에서 좋은 아빠라고 해서, 좋은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전에는 주로 슬픔을 견디는 모습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우리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는 쪽으로 관심사가 바뀌는 것 같아요.”
소설이 읽히지 않는 시대에 그의 고민은 한층 깊다.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편 소설만의 돌파구를 찾는 것도 모두 작가의 몫이다. “소설처럼 문장으로 만들어지는 서사는 ‘기억’에 특화돼 있어요. 누군가의 죽음을 현재진행형으로 따라가기 보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기억을 어떻게 반추하는지를 말할 때 더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주인공의 입을 통해 말하지 않고 이야기로 말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사회인으로서 소설가의 책무예요.”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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