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적으로요, 저렇게 위에서 개판을 쳐도 나라가 안 망한 걸 보면, 그나마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반증 아닐까요?”
최순실 사건이 ‘국정개입’이나 ‘국정농단’ 수준에 머물렀을 무렵, 그러니까 10월 말 정도에, 몇몇 공무원을 만나 이런 ‘자기 위로’ 식의 얘기를 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오판이었다. 최가 벌인 일은 ‘국정의 농단’을 넘어 ‘국정의 주도’였으며, 특정 사안에서는 최 스스로가 바로 국정 그 자체였다. 시스템이 돌아간다고 했던 말은 보름 만에 물려야 할 수밖에 없겠다.
최순실과 그 일당은 지나간 길에 풀 한 포기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단물을 빨았지만, 시스템의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적어도 최가 기웃거린 쪽에서 나라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간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돌아가고 있을 거라 믿었던 시스템은 대통령의 뒤끝과 레이저빔(직업공무원 강제 사퇴)에, 청와대 수석의 난데없는 전화(대기업 모금)에, 최순실 측근의 집요한 협박(회사 강탈)에 완벽하게 제압당했다. 최가 바라면 모든 것이 이뤄졌다. 나라는 망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단죄의 시간이다. 최순실과 그 일당에게 여러 죄를 물을 수 있다. 지금까지 직권남용과 사기미수 정도만 밝혀졌지만, 돌아가는 형세로 보아 뇌물죄를 추가하지 않을 수 없고, 기밀누설죄나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등 혐의가 적용될 수도 있다. 검찰 의지에 따라 특경법상 횡령ㆍ배임 또는 특가법상 조세포탈 등 죄목을 곧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그칠 수 없다. 나라의 미래를 생각할 때 가장 중한 죄는 형법 특가법 특경법 조문에 적힌 죄만이 아니다. 최순실 일당, 그리고 그들을 비호한 자가 나라에 가장 해를 끼친 것은 바로 국가 시스템을 무시하고, 깔아뭉개다가, 결국엔 무너뜨린 일이다. 선출되지 않은 자, 선출권력의 정식 위임을 받지도 않은 자가 나랏일을 주도했고, 세금을 주물렀으며, 측근을 요직에 꽂았다. 허무하게 무너진 시스템을 목격한 한 중앙부처 간부는 “어디 가서 공무원이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럽다”고 고개를 숙였다.
한 국가의 시스템이 어떻게 이렇게 무참히 무너졌을까? 공직사회의 결재 기능, 견제 기능, 내부고발 및 감찰ㆍ감사 기능 등 시스템을 지키던 다중 경보장치는 울리지 않았다. 무너진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대한민국 안에서 유일하게 시스템 위에 설 수 있는 권력이 스스로 시스템을 무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 되는 걸 되게 하라”고 국민이 몰아준 막강한 힘을 시스템 해체에 사용한 셈이다. 안타깝게도, 미약하나마 싹을 틔우려 했던 ‘시스템 통치’는 중단됐다. 전임 대통령이 스스로 휘두를 수 있었던 권한마저 포기해 가며 겨우 시작해 보려 한 시스템 통치였다.
어쩌면 무너진 시스템은 장기간 재구축할 수 없을 지 모른다. 시스템뿐 아니라 ▦정부에 대한 국민 신뢰 ▦언론의 권력 감시 기능 ▦공직사회의 자부심과 프로정신 등 시스템을 떠받치던 주위의 축들마저 상당 부분 약해지거나 함께 무너졌기 때문이다. 시스템을 다시 세워 일으키는 데 드는 정치적 대가, 유무형의 사회적 비용은 실로 엄청날 것이다. 후속 권력은 시스템에 의한 통치 대신 초법적 통치가 주는 달콤함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헌법 제84조(대통령의 불소추 특권) 때문에 실정법 위반 혐의는 나중에 물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스템을 무너뜨린 것은 형사적 책임이 아니라 정치적 책임의 영역에 해당하는 만큼, 지금 곧바로 물을 수 있다. 취임사에서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겠다”고 약속한 이가 나라 시스템을 스스로 무너뜨린 사건이다. 그러니 응당 그 책임은 자리로써, 지금 바로, 지게 해야 한다.
이영창 경제부 기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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