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씨의 국정농단으로 온 나라가 쑥대밭 형국이다. 국정 전 분야에 최씨의 ‘검은 손’이 미쳤다니 “이게 나라냐”라는 통탄이 절로 터져 나온다. 그 중에서도 스포츠는 문화와 함께 최씨의 이권개입 수단으로 최일선에서 ‘활용’됐다. 페어플레이와 땀방울의 가치를 믿는 체육인들이 모멸감에 몸서리치는 이유다. 최씨는 자신의 딸 정유라를 승마 국가대표팀에 집어 넣기 위해 공권력까지 끌어들이는 안하무인의 행태도 서슴지 않았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글로벌 초일류 기업 삼성전자가 최씨 모녀의 뒷배를 봐줬다는 의혹이다. 검찰 수사에 따르면 삼성은 최씨가 기획한 미르ㆍK스포츠 두 재단에 출연한 204억원 외에도 정씨의 승마 훈련비 35억원도 부담했다. 2010년 승마단을 해체한 삼성전자가 대한승마협회의 회장사를 맡아 최씨 모녀의 충실한 후견인임을 자처한 꼴이다. 혹자는 말한다. 최씨 모녀에 대한 승마협회의 기민한 지원은 삼성의 탁월한 정보력을 대변한다고…. 박근혜 정부에서 사업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최씨 모녀에게 밉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삼성은 일찌감치 알았다는 의미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인 이건희 회장이 일군 삼성전자가 최씨 모녀의 돈줄로 끌려 다닌 것은 한편의 블랙코미디를 보는 기분이다.
그룹 안팎에선 이 참에 비인기 스포츠에 대한 후원을 끊자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고 한다. 실제 삼성은 육상과 빙상, 승마 종목 등에 각각 매년 13억~17억원을 지원해오고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총액 기준 650억원이 넘은 돈을 사회공헌활동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다. 고교시절 레슬링 선수로 활약한 이건희 회장의 남다른 스포츠 사랑은 지금도 회자된다. 그 결과물로 한국 스포츠는 삼성과 함께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 세계 10대 강국으로 우뚝 섰다. 그런 점에서 삼성의 단세포적인 후원 중단 반응은 참으로 실망스럽다. 사실 삼성이 스포츠에서 발을 뺄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때는 묘하게도 이건희 회장의 와병 시기와 겹친다.
이전까지만 해도 삼성은 스포츠에서 항상 일등의 위치를 점하려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프로야구와 축구, 배구 등에서 선두주자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스포츠 제국’ 삼성이 2년 전부터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는 야구와 축구에서 처참하게 무너졌다. 승률 5할을 못 넘긴 야구는 9위로 팀 창단 이래 최악의 순위로 주저앉았다. 막내구단 kt를 제외하면 꼴찌나 다름없다. 프로축구 수원 삼성도 7위로 추락했다. 테니스와 럭비 팀은 아예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다. 두 팀의 연간 운영비는 정유라씨 개인 승마훈련비에도 못 미친다.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2014년부터 삼성은 스포츠를 ‘불필요한 비용’으로 인식했다. 경영합리화라는 명분으로 축구, 농구, 배구, 야구단을 차례로 제일기획에 떠넘겨 구단 운영비를 대폭 삭감했다. 하지만 스포츠에 대한 미래전략은 없었다. 급기야 제일기획을 매물로 내놓았지만 스포츠단이 매각에 걸림돌이 됐다는 설이 파다했다. 이재용 호가 이끄는 삼성의 스포츠에 대한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적어도 삼성이 스포츠를 그렇게 막 대하면 안 된다. 삼성이 굴지의 글로벌기업으로 안착하기까지는 스포츠에 진 빚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삼성은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부터 공식 후원사로 참여해 지난 8월 리우 올림픽까지 IOC 톱 스폰서로 이름을 올렸다. 브랜드 컨설팅업체 인터브랜드는 삼성이 20년 가까이 올림픽 파트너로 손을 잡아 대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했다. 1999년 삼성전자 브랜드 가치는 31억 달러로 명함을 내밀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2016년 브랜드 가치는 무려 453억 달러로 글로벌 기업 7위까지 도약했다. 문득 삼성이 스포츠와 올림픽, 두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지 않았다면 지금 어느 자리에 있을지 궁금해진다.
최형철 스포츠부장 hcc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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