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생 “게임할 시간에 촛불 들어”
2002월드컵 거리 응원처럼 들썩
“우리 같이 치워요” 청소도 한마음
외국인 “민주주의 실현 현장 봤다”
“박근혜 퇴진! 박근혜 퇴진!”
12일 오후 9시를 넘긴 시각,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일대는 함성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라틴밴드 ‘라퍼커션’의 드럼소리에 맞춘 함성은 차라리 구호가 아닌 노래에 가까웠다. 광화문광장에서 청사까지 신나는 멜로디에 이끌려 온 시민들은 어느새 휴대폰 플래시 불빛으로 조명을 만들고 몸을 흔들었다. 구호 제창이 끝나자 진짜 클럽처럼 여기저기서 ‘앙코르’도 터져 나왔다. 초등학생 아들을 데리고 나온 장동근(43)씨는 “노래하고 웃고 떠드는 게 꼭 2002한일월드컵 때 모여 거리응원을 하는 것 같다”며 “집회ㆍ시위가 국민의 뜻을 전하는 소중한 민주주의 수단임을 아이에게 느낄 수 있게 해줘 뿌듯하다”고 말했다.
100만명이 서울 도심 한 자리에 모인 11ㆍ12 시민항쟁은 민심의 분출구였다. ‘정권 퇴진’을 바라는 단단한 목표는 하나였지만 방식은 거칠지 않았다. 광장을 가득 채운 가족과 친구, 연인들은 부도덕한 정권에 분노한 연대의 감정을 서로 나누며 시민축제의 장으로 승화시켰다.
퍼포먼스와 풍자가 주도한 광장정치
오후 4시 민중총궐기 본 행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번뜩이는 재치와 풍자는 집회 현장의 분위기를 달궜다. 주최 측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예산 3억5,000만원을 들여 만든 ‘늘품체조’를 풍자한 ‘하품 체조’를 선보여 참석자들의 긴장을 풀어줬다. 세종문화회관 앞 버스정류장에는 박근혜 대통령 머리에 꽃을 단 풍자화 포스터가 붙었고, 행진 길목에 설치된 목을 쑥 내민 마네킹은 하야를 기다리다 지친 시민들의 심정을 대변했다. ‘배터리도 5%면 바꾼다’는 피켓 문구로 끝없이 추락한 박 대통령의 지지율을 꼬집기도 했다.
도심 행진이 끝난 뒤 진행된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범국민행동 콘서트는 유명 연예인들의 가세로 열기를 더했다. “당장 방 빼!”라는 방송인 김미화의 선창에 맞춰 시민들은 청와대를 향해 일제히 함성을 발사했다. 오후 10시쯤 공식 집회가 마무리되면서 시위의 엄숙함은 완전히 사라졌다. 춤 워크숍 ‘도시의 노마드’ 회원 14명은 대로에서 지나던 시민들의 손을 잡아 이끌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기획자인 현대무용가 최보결씨는 “세월호 참사, 대통령 만행으로 받은 상처를 함께 이겨나가자는 의미에서 직장인들이 조금씩 준비했다”고 말했다.
자발적 발걸음이 이뤄낸 100만 촛불
민주주의를 위해 기꺼이 거리로 나선 시민들의 발길은 평화집회의 동력이 됐다. 가족 단위 참가자는 5일 2차 촛불집회보다 훨씬 늘었다. 김선영(40ㆍ여)씨는 딸(9)과 어머니(65)의 손을 잡고 3대가 광화문광장에 섰다. 김씨는 “세대를 초월한 공분을 보여주고 싶었다”면서도 “절제됐지만 무겁지 않은 집회 분위기라 더욱 의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초등학생의 당찬 주장에 광장은 일순간 웃음으로 물들기도 했다. 이날 오후 방송인 김제동의 사회로 진행된 ‘만민 공동회’에서 한 여학생은 “이 시간에 메이플스토리(게임)를 하면 레벨을 올릴 수 있지만 이렇게 촛불을 들어 모든 사람이 평등해지는 나라가 되면 좋겠다”고 말해 큰 울림을 줬다.
경찰이 그토록 겁낸 도심 행진은 그저 평화의 전진일 뿐이었다. 시민들은 서울광장을 출발해 종로, 을지로, 의주로 등 다섯 갈래로 나눠 청와대로 향하면서 국민의 권리를 만끽했다. 중ㆍ고교생 4,000명이 행진을 마치고 도착하자 어른들은 환호하며 이들을 맞았고, 북쪽과 동쪽, 서쪽으로 갈렸던 촛불은 기어이 거대한 물결을 이뤄 청와대를 포위했다. 직장인 윤수진(30ㆍ여)씨는 “촛불이 즐비한데다 가수 이승환의 노래를 따라 부르니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 아닌가 착각마저 든다. 이렇게 즐거운 투쟁은 처음”이라며 웃었다. 영어교사인 미국인 라이언 베스트(30)씨는 “100만명이 모였는데도 절제돼 있다. 민주주의 가치가 실현된 현장을 한국에서 보게 됐다”고 감탄했다.
마지막까지 빛난 시민의식
집회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 나간 자정 무렵, 어디선가 “쓰레기 하나만 줍고 가주세요. 우리 같이 치워요”라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3주 째 빠짐없이 촛불집회에 나왔다는 조재은(19ㆍ여)씨는 몸집만한 쓰레기봉투를 들고 광화문광장 구석구석을 누볐다. 조씨는 “시민들이 먼저 주변을 깨끗이 해야 대통령에게 바른 정치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친구 3명과 쓰레기, 빈 페트병 등을 부지런히 주워담던 고교생 정은혜(16)양은 “어린 학생들도 자신이 머문 자리를 치울 줄 아는데 박 대통령은 왜 반성을 안 하는지 모르겠다”고 일침을 놨다.
경복궁역 인근 한 빌딩에서 근무하는 경비원 황모(57)씨는 이날 종일 시민들에게 화장실을 안내했다. 광화문 일대 음식점과 카페, 빌딩들도 화장실을 개방하는 식으로 작게나마 힘을 보탰다. 황씨는 “하루 내내 긴 줄이 이어졌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고 청결히 사용하는 모습이 아름답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