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마드리드에 사는 중년 여성 줄리에타(엠마 수아레스)는 포르투갈로의 이주를 앞두고 마음이 들떠 있다. 가슴 아픈 과거를 지우고 싶은 듯 얼굴엔 홀가분함이 뚜렷하다. 짐을 모두 싸고 마음의 준비도 끝낸 듯한 그에게 생각지도 못한 감정의 회오리바람이 불어온다. 딸의 옛 친구를 우연히 만나 딸의 특별하다 할 수 없는 근황을 들은 뒤 그는 연인과 함께하려던 포르투갈 행도 포기하고, 연인 몰래 옛집으로 이사까지 한다. 과연 줄리에타의 마음 속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딸과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줄리에타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간 것일까. 스페인 영화계의 명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그의 옛 영화들이 그렇듯 커다란 물음표를 던지며 멜로 미스터리라는 기묘한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연다.
영화는 과거 회상 장면과 현재를 교차시키며 줄리에타의 회한과 죄책감과 설움을 전한다. 학교 임시교사였던 줄리에타는 열차 안에서 만난 남자 소안(다니엘 그라오)과 사랑에 빠져 딸 안티아를 낳는다. 오랜 시간 혼수상태로 고통 받다 떠난 전 아내의 그림자가 소안에게 남아 있었으나 줄리에타의 삶은 행복으로 충만했다. 오랜 시간 가정부로 일해 온 마리안이 해고 당한 뒤 남긴 저주 어린 말이 불행의 씨앗을 뿌리기 전까지는.
영화는 오해가 낳은 불행에 초점을 맞추며 줄리에타와 안티아의 관계를 돌아본다. 삶의 유일한 지지대였던 안티아는 고교 졸업을 앞두고 갑자기 엄마 곁을 떠난 뒤 10년 넘게 연락을 끊는다. 안티아의 생사조차 모르던 줄리에타는 까닭 모를 죄책감에 시달리다 어느 날 딸을 마음 속에서 지운다. 하지만 딸에 대한 그리움과, 딸이 떠난 이유에 대한 의문은 되살아나 줄리에타를 슬픔의 진창으로 몰아넣는다.
엄마와 딸의 서러운 사연이 이야기의 줄기를 이루지만 스크린엔 미스터리의 기운이 감돈다. 엄마와 딸 사이에 일어난 일, 가정부 마리안이 저주를 남긴 이유 등 여러 궁금증을 유발하는 동시에 이야기의 퍼즐들을 하나하나 맞춰간다.
영화는 99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인간의 다채로운 감정들을 발산한다. 남녀의 슬픈 사랑이 있고, 질투와 욕망이 깃들어 있으며, 증오와 모성애, 여성들 사이의 우정까지 담는다. 여러 감정들이 조화를 이루며 슬픔이라는 정서를 정갈하게 드러낸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과 ‘그녀에게’(2002), ‘나쁜 교육’(2004), ‘귀향’(2006) 등을 통해 감정의 편린들을 하나로 꿰어 아름다운 서정을 빚어냈던 알모도바르의 빼어난 세공술은 여전히 빛난다. 화려한 색감으로 인물들의 여러 감정을 전하는 알모도바르의 특장을 기대한 팬들이라면 실망하지 않을 듯. 간단한 계란 요리 장면에서도 ‘예술’의 기운이 넘쳐난다. 17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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