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으로 둘러쳐진 개나리 울타리 밖에서는 종종 고성이 들렸다. 머리띠를 두른 사람들의 목소리는 낯설고 불온했다. 때로 어디선가 몰려온 수십명이 ‘노동자 탄압 중지하라’는 구호를 외치다 ‘닭장차’에 실려 사라지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선생님들은 우리를 단속하느라 바빴다. 잠시 구경이라도 할라 치면 득달같이 달려와 교실로 몰아넣었다.
고등학생 때였다. 분식집과 문방구가 있는 학교 동쪽 주택가에 ‘도시산업선교회’라는 이름의 단체가 들어서 있었다. 노동운동의 불모지로 여겨지던 1980년대 초반 청주였지만, 내가 기억하기로 이 단체의 활동은 대단했다. 청주공단에 입주한 중소업체들의 노동운동을 이 단체가 주도하고 지원했던 듯하다. 당시 어른들에게 도산(밖에서는 이 단체를 그렇게 불렀다)은 눈엣가시였다. 점잖은 목사님은 그곳을 이단이라 지목했고, 내가 좋아하던 윤리 선생님은 “도산(都産) 가는 곳에 도산(倒産)뿐이다”라는 말로 부정적 측면을 확정하셨다.
2학년 봄이었다. 노랗게 핀 개나리꽃에 취해 울타리를 서성이다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쪽과 관련된 듯 보이는 청년이었다. 꽃에 홀려 마음이 풀어진 터라 눈 흘기며 돌아서기도 난처했다. 어색하게 눈인사를 했다. 이후 분식집에서 쫄면 먹다가 혹은 길가다 간혹 스치고, 몇 마디씩 대화를 했다. 거기까지였다. 눈에는 결기가 가득했지만 그쪽 일에 호기심을 보이는 내게 그는 싸늘했다. “학생은 공부만 하면 돼.” 대단한 선비 나셨군! 그러면서 왜 그런 일에 뛰어든 거야? 돌아서 혀를 차면서도 마음은 고마웠다.
그 해 겨울 수업시간이었다. 외투 입고 전교생 운동장에 집합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전두환 대통령, 그분이 청주를 방문한다고 했다. 우리는 개신동에서 사직동으로 이어지는 대로 양쪽에 서서 환영 준비를 했다. 서청주 쪽으로는 청주고 학생들이, 종합운동장 쪽으로는 사창동 주민들이 도열했다. 눈 쌓인 길에서 칼바람 맞으며 기다리자니, 가뜩이나 꼬인 심사에 여기저기서 쌍욕이 튀어나왔다. 새파란 여고생들 입에서 대통령 부부는 난도질당하고, 위세 등등한 신군부 실력자와 문교부 장관까지 조리돌림 하듯 잘근잘근 씹혔다. 아이들이라고 모르는 게 아니었다.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으며 침묵했을 뿐. 뚝방 터지듯 밀려나온 욕에 가속도가 붙어 절정으로 치달을 무렵, 시커먼 그라나다 몇 대가 휙 하고 지나갔다. 제기랄!
교실로 들어오니 백설기빵과 서주우유가 분배됐다. 대통령의 선물이라고 했다. 심통이 난 나는 그 빵과 우유를 가져다 도산 청년에게 주었다. “자, 이거요.” 입 안 가득 빵을 넣으며 그는 웬 거냐고 물었다. 우유까지 맛나게 들이켜는 모습을 확인한 내가 대답했다. “대통령 하사품이에요. 빵으로 배부르고 우유로 입가심하고, 이 겨울 몸이 춥지 아니함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멈칫하던 그가 어이없다는 듯 폭소를 터뜨렸지만 기대하던 욕은 보태지 않았다.
며칠 전 인터넷을 달군 대구 여고생 자유발언 동영상을 보다 30년도 더 지난 짧은 만남을 떠올렸다. 사실은 말수 적은 그가 했던 어떤 말이 오래 가슴에 남았다. “성공한 혁명에는 농민과 10대가 있었다.” 4ㆍ19혁명을 촉발한 김주열이 고등학생 아니더냐고 반문하는 내게, 10대가 교실을 떠나 거리시위에 나서야 할 만큼 무자비한 시대는 지나갔다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었다.
“우리는 꼭두각시 공주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개돼지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동영상 속 소녀를 바라보다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저 야만의 시대로부터 멀리 벗어났다고 믿었다. 그러나 농민은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목숨을 잃고, 교복 입은 소녀는 모의고사 공부 대신 자유발언문을 써내려가는 세상이 우리 앞에 있다. 그들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한편으로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지금은, 혁명 전야인가 또 다른 야만의 시작인가.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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