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진흥위원회는 2008년부터 2년마다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한국영화제를 개최해왔다. 2006년 서울에서 처음 열린 중국영화제에 대해 화답하는 형식의 행사다. 홀수 해에는 한국에서 중국영화제를 열고, 짝수 해에는 중국에서 한국영화제를 개최하면서 양국 영화인들의 교류를 위한 큰 장이 매년 이어졌다.
하지만 올해 9월쯤 이미 열렸어야 할 한국영화제는 아직 소식이 없다. 10일 영화업계에 따르면 그 동안 한국영화제와 중국영화제를 공동 개최해온 중국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광전총국)이 올해 행사를 어떻게 진행해야 될 지에 대해 현재까지도 의견을 전혀 내놓지 않고 있다. 광전총국은 중국 내 방송 영화 신문 등 매체와 관련한 모든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대형 국가기관이다.
광전총국이 침묵함에 따라 한국영화제 연내 개최 여부는 극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영화계에선 한국 정부가 지난 7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도입을 발표하면서 촉발된 양국간 갈등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고 있다. 영진위 관계자는 “한국영화제 연내 개최를 계속 추진 중이며 주중한국문화원을 통해 공동개최를 할 수 있는 중국 쪽 기관을 물색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사실상 ‘2016 한국영화제’는 물 건너간 분위기다.
한국영화제의 불안한 운명은 중국 내 한류의 현주소를 대변한다. 사드 후폭풍으로 한류엔 매서운 삭풍이 불고 있다. 배우 이영애가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 이후 11년 만에 연기 복귀를 해 화제를 모은 TV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사임당’)의 미래도 한국영화제와 엇비슷한 처지다. 한중 합작으로 기획된 ‘사임당’은 지난 5월 1년여 동안의 제작을 마무리하고 한국 SBS와 중국 후난위성TV에서 10월 동시 방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드라마의 첫 한중 TV 동시 방영이어서 국내 방송계의 기대를 잔뜩 모았으나 ‘사임당’은 아직 어디서도 전파를 못 타고 있다. 중국 사전 심의가 지연되고 있어서인데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 당국의 강경대응 움직임이 영향을 끼쳤다는 게 정설이다.
사드 배치 결정이 한류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고는 하나 국내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중국의 반한 감정과 보복성 대응이 오래 가지 않으리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사드가 대형 악재인 것은 분명하지만, 한류를 가교로 삼은 한중 문화교류가 워낙 밀접하게 이뤄져 왔기 때문이다. 한 영화제작사 대표는 “중국 쪽 관계자들도 지금 정부 눈치 보며 다들 납작 엎드리는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한국 영화인을 배척하진 않는다”며 “중국 정부의 규제 움직임이 사라질 때를 대비해 물밑 교류를 더 많이 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드 배치 발표 전까지 “한류 띵호아”
사드 배치 발표 전까지 중국에서 한류는 훈풍을 타고 있었다.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이 지난 2월 발표한 보고서 ‘2015 해외 한류 실태 조사’에 따르면 중국인 30% 이상이 영화 드라마 가요 패션 등 한류 콘텐츠 이용량을 1년 전보다 늘린 것으로 나타났다. 한류에 대한 호감도도 지속적으로 높아졌는데, 한류라는 용어에 대해 “비호감”이라고 답한 중국인이 2012년2월엔 11.8%나 됐지만 지난해 11월에는 5.5%로 크게 줄었다. 비호감이 줄어든 만큼 호감도는 뛰었다. 2012년 2월 한류에 “호감이 간다”고 말한 중국인이 32.3%에 불과했으나 지난해 11월에는 45.2%나 됐다.
중국 내 반(反)한류 정서도 크게 줄어들었다. 2014년 11월 “반한류에 공감한다”는 의견이 19%였으나 지난해 11월엔 14%였다. “반한류에 공감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36.8%에서 40.3%로 늘었다. 전반적으로 한국 콘텐츠에 대한 인식이 좋아진 것이다. 하지만 사드 역풍에 따라 한류 콘텐츠의 중국 내 유통에 제약이 따르면서 올해 한류 소비는 줄어들고 한류에 대한 인식도 예전보다 부정적으로 바뀔 전망이다.
상승세를 타던 한류가 사드라는 된서리를 맞은 형국이지만 국내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중국 내 한류 자체가 일본 등 다른 국가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도 한류 전파 초기엔 다른 아시아 국가처럼 유명 배우가 출연한 드라마나 영화에 열광했고, 아이돌 가수들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소비양상은 달랐다. 전문 인력을 ‘수입’하고, 리메이크를 하는 등 한류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이 훨씬 다양했고 진화했다. 그 결과 중견 한국 영화감독과 방송 프로그램 PD가 대륙으로 건너갔다. 2010년대 초반 충무로와 여의도엔 웬만한 감독이나 PD는 중국으로부터 연출 제안을 받아봤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영화 ‘패션왕’(2014)의 오기환 감독은 한국 스태프가 대거 참여한 ‘이별계약’(2013)을 연출해 중국에서만 1억9,284만위안(약 325억원)의 흥행 수익을 올렸다. 예능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 등을 만든 김영희 PD는 중국에서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며 중국 안방을 직접 파고 들고 있다. 영화 ‘수상한 그녀’(2014)와 예능 프로그램 ‘아빠! 어디가?’와 ‘런닝맨’은 중국 판이 따로 제작돼 인기를 끌었다. 단순하게 한국 영화나 방송 등을 즐기는 단계를 넘어 자국 콘텐츠와의 결합에 힘쓰는 모습을 보였다.
얼음장 밑으로 여전히 흐르는 한류
최근 중국 자본이 한국 엔터테인먼트 기업 ‘사냥’에 나선 것도 세계 각국의 한류 소비와 다른 면모다. 컴퓨터 시각효과 전문회사 덱스터는 지난해 중국 완다그룹으로부터 1,000만달러를 투자 받았고, 배우 김윤석 유해진 등이 소속된 심엔터테인먼트는 중국 화이브라더스에 인수돼 이름까지 화이브라더스로 바꿨다. 국내 4대 영화 투자배급사 중 2곳(쇼박스, NEW)도 중국 자본과 만나 중국에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등 자본 교류를 강화하고 있다. 사람이 섞이고 자본까지 한데 묶이면서 한국과 중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됐다. 한류에 한파가 불어 닥쳤다 해도 중국과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한 매지니먼트사 관계자는 “중국 기업들이 투자를 하겠다며 ‘묻지마 구애’를 해와 옥석 가리기가 일일 정도였다”며 “최근 사드 때문에 중국 자본의 국내 투자도 주춤하고 있지만 곧 중국 자본의 투자 활동이 재개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 드라마 등 한류 콘텐츠 유통에 제동이 걸리고 중국 방송에 출연하는 연예인들이 잇달아 하차하고 있지만 다른 한 켠에선 여전히 긍정적인 신호도 나오고 있다. 멀티플렉스체인 CJ CGV는 2009년 개발한 4DX 상영 방식을 도입한 스크린 수가 세계 42개국 300개에 이르렀으며 이중 31개는 올해 중국에서 도입됐다고 밝혔다. 사드 악재로 한국산 소프트웨어가 대륙에서 고전하고 있으나 적어도 사람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는 하드웨어 분야는 여전히 소리 없이 강한 셈이다. 남상현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조사연구팀장은 “사드로 아이돌그룹 공연 취소가 늘어나는 등 여파가 크지만 중국 내 한류 수요는 여전히 많다”며 “중국인들의 반한 감정을 바탕으로 둔 악재가 아니라서 악영향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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