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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벳혁명을 기다리며

입력
2016.11.08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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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고 럭셔리한 벨벳은 피 흘리지 않고 이뤄낸 혁명의 수식어로도 종종 사용된다. 게티이미지뱅크
부드럽고 럭셔리한 벨벳은 피 흘리지 않고 이뤄낸 혁명의 수식어로도 종종 사용된다. 게티이미지뱅크

올 가을/겨울, 벨벳의 등장이 눈부시다. 예복용 앙상블 의상에나 쓰이던 벨벳이 올해 거리 패션을 수놓는 ‘매혹적’인 소재로 떴다. 꾸깃꾸깃한 느낌의 벨벳을 이용, 트렌치코트, 와이드 팬츠, 슬립 원피스, 남성적인 느낌의 재킷에 이르기까지 캐주얼 단품들이 거리를 수놓았다.

벨벳은 20세기 후반 현대 패션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며 대중적 매력을 잃고 패션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1997년 이후 낭만적인 느낌과 복고풍이 유행하게 되면서 트렌드 속으로 들어온다. 벨벳은 정확하게 말하면 직조한 직물의 구조를 뜻하는 것으로 면이나 울 같은 섬유가 아니다. 직조한 직물의 표면을 구성하는 실의 고리들이 볼록하게 돌기를 이룬 탓에, 표면에 쏟아지는 빛의 방향에 따라 부드러운 광택 효과를 낸다. 이러한 특성이 벨벳을 우아함의 표상으로, 20세기 중반까지도 부와 사치를 상징하는 패션의 소재로 자리매김하도록 했다. 짧게 깎은 모피를 손가락으로 만질 때 느껴지는 성적이고 관능적인 질감을 유발하기 위해 벨벳이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큰 힘을 얻고 있다.

벨벳을 처음으로 발명한 나라는 어디일까? 중국, 이집트, 이라크가 서로 원조라며 우기고 있다. 기원전 3세기 중국의 진나라 당시 견을 직조해서 만든 벨벳 조각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연대순으로는 가장 앞선다. 벨벳 직조기술은 워낙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 들어서 고대부터 궁극의 럭셔리라 불렸다. 당연히 왕족과 최상위층 부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유럽인들은 아름다운 동방의 직물을 보자마자, 곧바로 실크로드를 통해 교역에 들어갔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벨벳 산업을 일으킨 국가였다.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은 12세기 18세기까지 벨벳 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해서 엄청난 부를 얻었다. 이탈리아의 벨벳은 실크에 금사와 은사를 섞어서 짠 것들로 교회가 주요 고객이었다. 부유층들은 벨벳을 가구와 의복, 벽지에 사용했다. 나아가 가문의 위신을 표현하는 문장을 수놓는데도 사용한다.

벨벳 장인들의 수입은 일반 직조공의 40배가 넘었다. 그만큼 벨벳 장인이 되는 길도 험난했다. 훈련 기간만 4년에서 최대 8년이며 장인이 되기 위해서 다양한 시험도 통과해야 했다. 품질 관리의 수준도 엄격해서 밀라노의 견사길드는 66㎝ 단위로 직조된 벨벳을 검사하여 승인 도장을 찍었다. 사전을 찾아보면 벨벳(Velvet)은 속어로 ‘도박으로 딴 돈 혹은 예상한 것 이상의 수익’을 의미한다. 사람이 벨벳으로 만든 장갑(velvet glove)을 끼었다고 할 때는 외유내강형의 성품을 가졌다는 뜻으로 확장된다. 영국의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가 연출한 ‘블루 벨벳(blue velvet)’은 영어권에서는 속어로 마약을 뜻한다. 영화 전면에 흐르는 몽환적인 느낌은 제목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한다. 이외에도 많다. 부드러운 미성을 가진 재즈 가수들의 목소리를 벨벳 보이스라고 부른다. 인상주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그림 속 여인들처럼, 매끄러운 피부를 가진 여인을 묘사하는 붓 터치의 시대를 ’벨벳 시대‘라고 불렀다.

정치권에서도 벨벳은 중요하다 1989년 바츨라프 하벨의 주도 아래 공산 통치를 종식하고 자유화를 요구와 더불어 최초의 자유선거로 하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체코의 공산 정권을 붕괴시킨 시민혁명은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적 시위를 통해 정권 교체를 이뤄낸 무혈혁명이다. 벨벳 표면처럼 부드럽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뤄낸 혁명이기에 붙여진 애칭이다. 지금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한국사회는 시민혁명의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평화롭게 이 땅의 주권이 누구의 것인지 말하는 길 위의 시민들이 나는 존경스럽다. 그들은 대통령을 꼭두각시로 이용하여 국가를 상대로 도박을 벌여온 집단을 향해,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붙여야 한다. 우리들의 혁명이 이번만큼은 총칼에 빼앗기지 않게 되기를 소망한다. 벨벳 장갑을 끼고 우리의 정당한 혁명을 이뤄내야 할 때다.

김홍기 패션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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