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에게 레임덕은 없을 줄 알았다. 4월 총선 이후 정치지형이 여소야대로 바뀌자 누구나 대통령의 힘이 빠지겠거니 했지만 일찍 레임덕에 기대어 움직인 이들은 대가를 치러야 했고, 이를 지켜본 사람들 사이에서 레임덕이란 말은 쏙 들어갔다. 실은 사정과 정보, 인사권을 쥔 권력이 무서워 입을 닫았을 뿐이었지만. 최순실 사태가 나고도 한참을 그랬다.
그때 진실을 가려 대통령의 레임덕을 막는데 나섰던 이들 대부분이 아직 여의도 정치권과 청와대, 관가에 있다. 선거로 정치에 진출한 리더이고, 능력이 검증된 정책결정자이며 참모들이다. 아마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앞둔 지금 가장 고통스런 사람들은 이들 일 수 있다. 스스로 사실이라고 믿고 내뱉은 말들이 거짓으로 드러나고 있으니 그 참담함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이제 와 보니 누군가의 사기극에 휘말려 버린, 신념과 견해가 무너져 내린 게 이들의 솔직한 처지다. 좋게 말해, 대통령의 리더십과 국정 어젠다를 믿고 따른 결과 자신의 존재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 졌다.
억울하고 하고 싶은 말도 많을 것이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수석은 최순실 사건 초기부터 줄곧 정말 최순실의 존재를 정말 몰랐다고 했다. ‘대통령이 그런 말을 미리 해주었더라면 이리 당혹스럽지 않았을 것’이라며 대통령에게 서운해한 대목도 있다. 10년 친박계 담당 기자도 최순실의 역할을 알지 못했다고 하니, 그 심경 십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자신이 불법으로 기업들에게서 강제모금을 하는데 동원되고 있는 사실조차 몰랐을 리는 없다. 안 전 수석처럼 많은 이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나 말이 진실하지 않을지라도 스스로 믿고 따라갔다. 이들이 적법한 일인지 먼저 고민하고, 나중의 책임을 생각했다면 지금은 상황은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얼마나 많은 진실과, 그것을 밝히려는 노력들을 무시하고 회피했는가. 진실을 떠나, 국가이익을 벗어나 정권의 이해와 당리당략에 스스로 뛰어들고 권력에 추종했는지 묻고 싶다.
그런 자발적 협조가 없었다면 지금 드러나는 기만과 속임이 정치와 정책에 숨어들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어느 순간 최순실 사건의 부역자가 된 이들은 스스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국민들이 듣고 싶은 것에는 대통령 말고 이들의 고백도 있다. 대통령의 진실은 검찰 손에 넘어간 지금 사법처리에서 자유로운 이들은 어떤 말이라도 털어놔야 한다. 한 명이면 족했을 의혹의 대변인들이 도대체 몇 명이었던가.
진실을 몰랐을 수는 있겠지만 이들에게는 그런 솔직함이 권력에 대한 충직함에 가려지고 밀려나 있었다. 4일 강은희 여성가족부 장관이 의원시절인 2014년 최순실의 딸 정유라씨의 승마 특혜 의혹을 옹호한 일을 사과한 것은 신선했다. 강 장관은 당시 야당 의원이 제기한 유라씨의 승마 특혜 의혹에 대해 허위사실이라며 명예회복이 필요하다고 감싼 장본인이다. 뒤늦게 고개를 숙인 것은 야당의 질책에 버티다 무너진 결과였지만, 울먹이며 자리에 연연해 하지 않겠다고 말한 건 우리 정치의 오랜 상투성에서 벗어난 행동이었다.
제2, 제3의 강은희가 나와야 할 이유는 많다. 그렇지 않다면 여의도 정치와 청와대의 작동방식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고, 같은 무대에 설 사람만 5년마다 바뀔 뿐이다. 정권마다 반복되는 대통령의 사과는 안타까운 일이다.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버려야 하지만, 그 축축한 뗏목을 끌고 가니 문고리 권력에 국정이 휘둘렸다. 정권이 아닌 국가의 이익을 위해 뽑히고 등용된 이들마저 거기에 올라타곤 했다. 사실 2년 전 이들이 뭉개버린 정윤회씨 사건만 제대로 처리했어도 이번 사태는 없었을 일이다. 지금 다시 우리 사회 리더를 뽑는 선거가 시작되려 꿈틀대고 있다. 권력과, 그 권력을 좇는 이들에게 더 이상 진실이 금기여서는 안 된다.
이태규 정치부장 tg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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