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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칼럼] 희망을 묻다

입력
2016.11.06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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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폭력적인 경험은 그 사람의 일생을 결정한다. 이를테면 영화 ‘대부’의 주인공 비토 콜레오네가 그렇다. 어린 시절 그의 가족은 시실리 갱들에게 무력하고 어이없는 짐승처럼 살해당한다. 갱의 총탄을 피하여 달리기 시작한 그의 인생은 이제 질주를 멈출 수 없다.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 원수를 갚을 때까지, 그는 신대륙의 성장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질주한다. 그에게 자기 인생의 목적을 새삼 생각할 여지는 없다. 원초적 폭력이 그에게 뿌리칠 수 없는 인생의 숙제를 부여했으므로, 그는 그 숙제를 하다가 죽어야 한다. 산책을 하고 연극을 상연하고, 시를 낭송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원수를 갚고, 새로운 가족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장성한 그는 마침내 올리브기름 한 통을 들고 햇빛 부서지는 시실리로 향한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늙은 원수의 귀에다 대고 속삭인다, 내 아버지 이름은 안토니오 안돌리니. 그는 자신이 누군지를 원수에게 확인시킨 뒤 조금의 주저도 없이 원수의 뱃가죽을 따버린다. 두어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원수의 저승길을 한껏 재촉해버린다. 어린 시절 가족을 잃었던 비토 콜레오네의 가장 행복해 보였던 모습은, 딸 코니의 손을 잡고 그 유명한 대부의 음악에 맞추어 인파를 천천히 헤치고 마당에 마련된 가설무대 위에 올라 딸의 축복을 빌며 춤추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의 앞뒤로 밀실의 담합과 말대가리가 잘리는 잔혹이 넘실대는 세상 속이었다고 해도. 그러나 그의 행복은 지속되지 않는다. 원초적 폭력을 되먹임하기 위해 그의 생애는 이미 소진되었고, 그의 딸은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고, 아들은 가족을 죽인 죄의식으로부터 평생 안식을 얻지 못한다.

어떤 폭력적인 경험은 때로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를테면 식민지배를 받아들여야 했던 한국이 그렇다. 제국주의에 침탈당한 한 조공국의 황혼. 난입한 제국주의자들은 말했다. 너희는 스스로 현대적인 공적 질서를 창출해서 살아갈 능력이 없으므로 우리가 대신 지배해주겠다. 그 말을 부정하기 위하여 한국인들은 질주를 시작한다. 추구할 공동체의 헌법적 가치를 새삼 숙고할 여유는 없다. 원초적 폭력이 한국인에게 떨치기 어려운 공통의 숙제를 부여했으므로, 한국인은 그 숙제를 하며 현대사를 소진해야 한다. 세밀화를 배우고, 석판화를 수집하고, 시집을 천천히 고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부동산 투기를 하고, 자식을 대학에 보내어,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한다. 제국주의자들의 침탈과 모욕을 피하여 달리기 시작한 그들은 정부 수립을 거쳐, 동족상잔의 전쟁을 넘어, 현대국가의 모습을 갖출 때까지 멈출 수 없다. 마침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까지. 그것이 결국 무엇을 위한 질주이든, 그들은 일단 세계 자본주의의 주변부에서 질주해야만 한다.

마침내 잘 조립한 자동차 한 대를 들고 제국주의자들의 면전에 나설 수 있게 되었을 무렵, 광주민주화운동은 신군부에 의해 짓밟힌다. 그리고 그 해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은 한국인은 들쥐와 같아서 민주주의가 맞지 않다고 말한다. 이제 한국인은 다시 질주한다. 마침내 우리도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까지 그들은 시청광장을 지나, 광화문 네거리를 관통하여 질주한다. 우리가 쥐떼에 불과한 존재가 아님을 보여줄 때까지. 그 질주 끝에 도달한 21세기의 폐허. 한 세기에 걸친 숨 가쁜 질주가 가져다 주리라 믿었던 현대적인 공적 질서의 오롯한 붕괴. 엘리트 카르텔의 빨대가 꽂힌 공동의 희생양으로서의 정체(政體ㆍbody politic), 그 위에서 직선제로 선출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굿을 한 적이 없으니 믿어달라고 울먹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증명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다. 스스로를 갱신하여 현대적인 공공의 삶을 구현할 수 없는 쥐떼라고 불렸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기 전과는 더 이상 같을 수 없다. 이 땅에 희망이 있어서 희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기에, 희망을 가진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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