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 사태수습으로 가닥을 잡은 것인가. 죄상을 은폐할 만한 틈을 반 발짝씩 허락하면서 수사를 하는 검찰, 황급한 총리 인사와 두 번의 사과로 상황을 무마하려는 정부. 속도는 빠르지만 효과는 의문스럽다. 검찰수사 과정은 여전히 진실을 은폐하는 과정으로 비춰진다. 권력유지를 원하는 자는 대통령의 두 번째 사과가 사태수습 과정에서 정점이 되길 기대했을 테지만, 이번 사과는 박근혜 대통령이 갖게 된 무능과 의존의 이미지를 실재로 확인시켰다.
그럼에도 권력과 그 운영 시스템은 변화하지 않았고, 민주주의 회복은 난망하다. 더욱이 경쟁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적 일상은 여전하며, 노동시간은 길고 삶은 팍팍하다. 알면서도 다시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본질적인 변화 없는 망각…. 낯설지 않다.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무엇에 분노하는가? 시민으로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국가의 품격을 역설하던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 권력의 공공성을 위한 그 모든 절차와 시스템이 무시된 것과 민주주의를 위한 수많은 인내가 무색해졌다는 것에 대한 허탈감, 그 모든 것이 분노의 대상이다. 더욱이 비정상적인 정치과정은 정치의 산물인 현 정부의 모든 정책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한다. 박근혜 정부의 그 때 그 정책들은 과연 온전한 것이었을까. 유신 독재시절에 대한 진한 향수를 갖고 있는, 사익에 골몰한 땅부자 개인에 의해 국정이 좌우되었다면, 그간의 정책들이 그의 이해관계와 식견을 통해 걸러졌고 그 개인과 재벌과의 거래에 영향받은 것은 아닌가. ‘창조경제’ ‘문화융성’은 불신의 대상이다. 문화체육정책은 물론 재벌개혁 폐기, 노동조합 탄압과 노동개혁, 건물주에게 유리한 상속세 개정, 국정교과서 추진, 석연치 않은 한일 위안부 협상 모두 의심의 대상이 된다. 경제민주화는 물론 노동보호와 삶의 질을 위한 많은 과제들이 방치된 것도 누군가의 사익 실현에 유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사익을 위해 국가권력을 제멋대로 주무르는 비정상적인 정치가 이루어졌다면, 그 결과인 정책을 정당화할 수 없다.
국면이 길어질수록 정국 수습의 목소리는 커지기 마련이지만 시민들이 원하는 것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다. 박근혜 대통령 뒤에 숨어버린 영리한 권력과 거래에 응한 재벌들이 책임을 모면할 가능성도 크다. 선거 때 대통령 사진을 두고 다퉜던 자들은 이미 재빠른 쥐처럼 난파선을 떠났다. 혹자는 개인은 적당히 처벌하되 진실은 은폐하고, 인형사는 교체하되 권력의 연속성을 추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무능하거나 분별없는 개인이 아니라 그녀를 포장해 내세워도 쉽게 통하는 허술한 시스템과 이를 활용하는 비윤리적인 권력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규명하고 죄지은 자는 처벌하고 정책은 원점으로 돌려야 하며 권력은 바뀌어야 한다. 이것이 논리적 해법이다. 모든 것은 정확하고 합당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진짜 변화는 이제 시민들의 손에 있다. 비윤리적인 권력이 허술한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스스로를 처벌할 수는 없다. 권력의 사유화에 저항하고 민주공화국을 지키는 것은 권력 ‘위임’만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확인했다. 청와대 어딘가에 유기한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서는 시민의 일상이 달라져야 한다. 토론하는 것, 집회와 시위를 통해 의사를 표현하는 것, 정치와 정책을 점검하는 것이 일상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진짜 필요한 변화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이 시작점일 수 있다. 뻔한 정국수습 시나리오를 방관하지 않는 것, 모든 정책적 실기를 원점으로 돌리고 우리 사회의 방향을 새로 설정하는 데 참여하는 것이 시민의 정치적 자존심을 회복하는 길이다. 일로, 쇼핑으로, 뉴스의 소비자로 그냥 돌아가기에는 분노가 크고, 맞서야 할 권력이 허술하지 않다.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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