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터리어스 RBG
아이린 카먼, 셔나 크니즈닉 지음ㆍ정태영 옮김
글항아리 발행ㆍ272쪽ㆍ2만3,000원
성숙한 인격의 어른이 있다는 것은 그 사회의 시스템이 건강한 인큐베이터라는 증거다. 불안한 청춘들은 존경할 만한 어른을 보고 삶의 방향성에 대해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꾸라진 어른들이 즐비한 한국 사회는 불행하다. 시인 작가들을 둘러싸고 쏟아지는 성추문들에는 한숨만 나오고, 비선실세와 더 대면이 많았던 대통령에는 절망하게 된다. 멘토 열풍은 그만큼 이 사회에 ‘어른’의 존재에 귀하고, 그런 존재를 열망한다는 증거다.
‘노터리어스 RBG’는 미국 연방대법관 루즈 베이더 긴즈버그 평전이다. ‘RBG’는 미국 페미니스트와 진보의 아이콘이다. SNS에서는 RBG를 해시태그로 단 게시물을 흔하게 볼 수 있고, 그녀를 테마로 한 네일아트, 타투, 할로윈 코스튬도 있다. 1993년부터 대법관의 자리를 지켜온 긴즈버그가 뜻밖의 팬덤을 얻은 것은 아니다. 긴즈버그는 ‘존재 자체가 급진적이었다’. 유대인인 그녀는 컬럼비아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했음에도 원하는 일자리를 구하는 데 애를 먹었다. 1972년에는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에서 여성권익증진단을 공동으로 출범시켰다. ‘폭탄을 던지기보다 폭탄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긴즈버그가 늘 환영 받았던 것은 아니다. 변호사 시절 남성 원고들과 소송을 자주 벌였기 때문이다. 성별고정관념이 강했던 당시에는 여성만 사회수당을 받을 수 있었다. 긴즈버그는 ‘여성이 평등하나 지위를 확보하려면 남성도 해방돼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법정에 남성 원고를 등장시켰다. 임신 중절을 여성의 프라이버시로 여기며 옹호했던 것도 일부 페미니스트들에게 비판 받았다. 임신을 본질적으로 특별하게 취급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우리 모두 나 자신으로 살아갈 자유가 있고, 이 원칙에는 성별이나 인종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지킨 RBG는 마침내 1993년 대법관에 지명됐다. 법정에서도 결코 신념을 굽힌 적이 없다. “대법원이 중차대한 사안에서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계속해서 소수의견을 낭독할 생각입니다.” 그녀는 대법원 내 최다 소수의견 낭독 기록을 세웠다. 악명이 높다는 뜻의 노터리어스(notorious)는 일종의 훈장이다.
저자 아이린 카먼과 셔나 크니즈닉은 긴즈버그의 개인적 삶도 놓치지 않는다. 대통령 연두교서 때 꾸벅꾸벅 조는 긴즈버그의 모습은 엉뚱하기까지하다. 54년을 부부로 산 마티 긴즈버그와의 훈훈한 이야기도 있다. 하버드대 로스쿨에 함께 진학할 것을 먼저 제안할 정도로 마티는 든든한 파트너였다.
지난 7월 RBG는 트럼프를 공개적으로 ‘사기꾼’이라고 비난했다. 일각에서는 그녀가 경솔했다고 지적하지만, 83세의 RBG는 여전히 폭탄을 만지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녀는 미국의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어른’이다.
변해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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