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전이 된 삶’을 메멘토의 첫 책으로 냈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었다. 창업 전 다니던 출판사에서 ‘낭독 한국어’라는 기획을 진행한 적이 있다. 이 기획의 연장선상에서 고전 문장가의 대표적인 명문들을 엮은 책을 만들고 싶었다. 관련도서를 찾다가 ‘중국 문장가 열전’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중국문학 연구자인 이나미 리쓰코(井波律子)가 쓴 이 책은 궁형의 굴욕을 참아내고 ‘사기’를 쓴 사마천(전한)부터 중국 리얼리즘 소설의 선구자인 오경재(청)까지, 중국의 명문장가 10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추적한 책이다. 한국어판은 절판 상태. 번역자는 ‘책문’을 쓴 동양철학자 김태완이었다. ‘주자평전’으로 제56회 한국출판문화상 번역 부문을 수상한 그는 탁월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탐이 나기는 했지만 그대로 낼 수는 없었다. 정작 읽고 싶었던 문장이 없어서였다. 김태완 선생께 열전에 언급된 각 문장가의 대표적인 산문을 찾아서 추가로 번역을 해주십사 부탁 드렸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내가 다니던 출판사의 임프린트가 통째로 없어졌다. 한동안 공황 상태에 빠졌다가 정신을 차리고 진행해온 기획의 일부를 다시 계약했다. 메멘토의 첫 책으로는 국내물을 내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털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미 두툼한 번역 원고를 가지고 있던 참이라 출간 순서를 바꾸었다. 말하자면 우리 출판사 첫 책은 우연의 결과인 셈이다.
마르고 닳도록 원고를 보고 또 봤다. ‘분노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로 제목을 정하고 서예가 이성배 선생의 캘리그라피를 받아 표지까지 완성했다. 그러고는 한 출판사 대표님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그런데 콘셉트를 다시 생각해보라는 말씀에 해온 작업을 뒤집어엎었다. 책을 내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나온 제목이 ‘고전이 된 삶’이다. 책을 내면서도 반신반의했다. 엮은이 덕분에 비수같이 날카로운, 울분에 찬, 비감한, 쾌락한, 활달한, 신랄한, 유려한 고전 문장의 진면목을 책에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 한 편 읽을 여유조차 없는 시대에 고문이라니. 게다가 처세와 허세를 제거한 중국 고전을 누가 볼까 싶었다.
예로부터 명저는 “몸과 정신이 견딜 수 없는 한계 지점까지 내몰린 사람의 절망과 분노를 발판으로 삼아 태어난다”고 한다. 육체의 고단함을 피하고 정신의 나태함을 방관하는 나 같은 부류는 끝내 성취하지 못할 글쓰기의 경지다. 하지만 그 빛나는 재능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삶을 노래하고, 이야기를 창조했던 문장가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우리 같은 범속한 이들은 일용할 삶의 행복을 얻는다. 실제로 이 소란한 세상에서 고요하게 문장의 매력을 즐기는 이들이 있어 이 책은 제 몫을 다했다. 그들이 참 고마웠고, 한편으로는 한없이 존경스러웠다.
박숙희 메멘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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