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텍사스 주의 퇴락한 소도시. 벽에 휘갈겨진 낙서가 의미심장하다. “이라크 파병 세 번 갔다 와도 정부에서 한 푼 도와주질 않더라.” 텍사스는 조시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고향이다. 부시 전 대통령은 텍사스 주지사를 거쳐 최고 권좌에까지 올랐다. 부시 전 대통령이 주도한 이라크전쟁에 참전하고도 국가로부터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했다는 하소연은 2000년 후반 미국 서민들의 고통을 대변한다.
부시 전 대통령은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이겼으나 경제 전쟁에선 참패했다. 그의 임기 막바지인 2008년에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 서민들에겐 악몽이었다. 주택담보대출로 집을 샀던 많은 미국인들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벌어지면서 길거리에 나앉게 됐다. 대형 주택담보대출 회사들이 파산하면서 금융권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돈 없는 서민들은 후폭풍을 맞았다. 대통령의 고향 텍사스 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는 텍사스 주를 배경으로 두 남자의 이유 있는 강도 행각을 좇으며 현대 미국 사회의 그늘을 비춘다.
21세기판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기시감을 일으키는 이야기가 스크린을 장식한다. 형제인 테너(벤 포스터)와 토비(크리스 파인)는 텍사스 소도시(라고 하기엔 너무 작지만)의 특정 은행 지점들을 급습한다. 이들의 범죄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일련번호가 적힌 수표나 금고 속 거액을 노리지 않고, 창구에 있는 푼돈만 털고선 급히 떠난다. 이른 아침 직원도, 고객도 얼마 없는 은행을 범행 대상으로 삼고, 달아날 때 통쾌함에 젖어있다는 점도 이들 범죄의 특징이다.
황량한 모래바람을 불러일으키며 유희를 즐기듯 떠돌이 범죄를 저지르는 테너와 토비의 행동은 고전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를 떠올리게 한다. 보니(페이 더너웨이)와 클라이드(워렌 비티)를 중심으로 한 일당의 범죄 행각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1930년대 대공황의 어둠을 들춘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로드무비의 형식을 취하며 당대 미국 사회의 풍경을 스크린에 채록한다. 보니와 클라이드 일당의 난폭한 행동 뒤로 가난한 농부들의 고단한 삶이 흐른다.
‘로스트 인 더스트’도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형식을 따른다. 테너와 토비가 은행을 터는 과정은 퇴락한 텍사스 주의 면면을 배경그림으로 삼는다. 허름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웨이트리스의 피곤에 찌든 모습, 카지노에서 토비의 돈을 노리고 접근하는 한 여인의 행동은 불황의 짙은 그림자를 상징한다. 요컨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와 ‘로스트 인 더스트’는 범죄자들의 악행을 넘어 그들의 범행을 유발한 사회적 맥락을 짚는 영화들이다.
‘머니 몬스터’에 대한 또 하나의 고발
테너와 토비 형제가 은행 강도로 나선 사연은 기구하다. 대대로 살아온 목장을 담보대출금 4만5,000달러 때문에 은행에 뺏길 위기에 처해서다. 게다가 목장 뒷마당에서 뒤늦게 석유가 발견됐으니 가난만을 탓하며 주저 앉아있을 수도 없다. 어려서부터 불량했고 감옥을 수시로 드나든 테너와 모범생 토비는 부모의 유산을 지키고 이를 자식에게 넘겨주기 위해 총을 든다. 적은 대출금만으로도 고객의 재산을 빼앗는 악랄한 은행의 행태에 복수를 하고픈 심정도 그들의 범죄 동기 중 하나다. 이들 형제가 목숨 건 강도 행각을 저지르면서도 일확천금을 노리지 않는 이유다.
테너와 토비를 쫓는 경찰 마커스(제프 브리지스)의 파트너인 인디언 혼혈 경찰은 이런 식의 말을 한다. “예전 이곳(텍사스)은 우리 조상들 소유였는데 당신(백인)들이 뺏어갔다. 이제 저들(은행)이 그 역할을 한다.” 돈을 향한 탐욕에 의해서만 작동하는 금융자본주의 체제를 비꼬는 말이다.
금융자본주의의 폐해는 2008년 이후 할리우드의 단골 소재가 됐다.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2013)는 약탈적인 미국 금융가들의 행태를 고발하고, ‘빅쇼트’(2016)는 금융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해 부를 쌓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월가를 비판한다. 조디 포스터의 최신 연출작 ‘머니 몬스터’(2016)는 주가 조작에 일조하는 주식방송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앤드류 가필드 주연의 ‘라스트 홈’(2014)도 경매로 나온 집들을 싹쓸이하는 냉혈한과 적은 담보금 때문에 집을 잃게 된 한 젊은이의 사연을 렌즈 삼아 약탈적 금융자본주의의 맨 얼굴을 들여다 본다. ‘로스트 인 더스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나온 이런 영화들과 같은 선상에 있는데, 강도 영화 또는 서부영화의 특성을 끌어와 장르적 재미를 준다.
‘자이언트’에 대한 향수
‘로스트 인 더스트’의 공간적 배경은 시네필들에게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텍사스를 배경으로 한 고전영화 ‘자이언트’와 ‘바람에 쓴 편지’(이상 1956)를 연상시킨다. ‘자이언트’에서 대목장주 조단(록 허드슨)은 자신 밑에서 조수 일을 하던 제트(제임스 딘)에게 누이의 유언에 따라 불모지 얼마를 떼어준다. 조단에게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던 제트는 끊임없이 석유를 시추하다가 결국 벼락 부자가 된다. ‘자이언트’는 돈에 의해 촉발된 미국 사회의 계급 갈등을 은근히 보여주면서 미국이 여전히 기회의 땅임을 암시한다.
‘바람에 쓴 편지’의 갈등 구조는 ‘자이언트’와 엇비슷하다. 부유한 석유상의 아들 카일(로버트 스택)과 그의 죽마고우 미치(록 허드슨)의 관계는 계급 갈등을 내포한다. 불임에서 비롯된 강박관념에 시달리던 카일이 아내 루시(로렌 바콜)와 미치 사이를 의심하면서부터 몰아치는 감정의 파도가 스크린에서 내내 출렁인다. 카일이 고급승용차를 타고 자신의 ‘영지’에 건설된 석유생산시설 주변을 내달리는 모습은 중의적이다. 물질적인 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로우나 정신적으로는 빈곤한 카일의 상태를 빌려 당대 미국 사회를 에둘러 비판한다. ‘자이언트’의 제트가 남들의 조롱을 딛고 석유 부호의 자리에 오른 뒤 겪는 심리적 공허는 카일의 모습과 공명한다.
‘로스트 인 더스트’는 테너와 토비가 은행을 턴 뒤 도주극을 벌일 때 퇴락한 석유생산시설을 곧잘 보여준다. 물질적으로 충만했던 시절도 저물고 정신적으로도 가난한 시기를 맞이한 미국 사회(또는 텍사스 지역공동체)의 현재를 웅변한다. 가난한 자들이 역경을 딛고 일어서기 힘든 절망의 시대, 그들은 과연 무엇으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그들이 지나친 욕심을 자제하고 딱 자기 몫만 되찾는 심정으로 범죄를 저지른다면 과연 우리는 돌을 던질 수 있을까. 탐욕으로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금융자본보다 과연 그들이 더 나쁘다 할 수 있을까. ‘로스트 인 더스트’가 미국의 현대사를 관통하며 던지는 질문들이다.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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