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은 한 정권이 나라를 어떻게 이끄느냐에 따라 그 시기 국가에 대한 성격을 다르게 규정한다. 민주주의는 억압되었으나 경제성장을 지속해서 이루었던 1960, 70년대 한국은 이른바 ‘개발국가(developmental state)’로 분류된다. 민주주의를 빙자했으나 실상은 권력의 사적 전횡이 자행되고 경제적 성취와는 거리가 멀었던 50년대 세계 최빈국 ‘싸우쓰코리아’는 소위 ‘약탈국가(predatory state)’로 이해된다.
약탈국가의 집권세력은 헌법의 권위와 국가의 위세를 활용하여 국민을 약탈하고 자신들 부의 축적에 몰두한다. 정작 국가발전에는 무관심하고 무능하다. 2016년 늦가을, 우리는 이 나라가 ‘개발국가’로의 퇴행을 넘어 50년대의 ‘약탈국가’와 같은 상태로 지난 4년을 보냈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해지고 있다.
보도된 바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 아래에서 헌법의 기본원리는 권력의 최상층부에서부터 조직적으로 파괴되었다. 대통령이 아닌 숨은 권력자들이 나라의 주요 의사결정들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그것은 고스란히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에 활용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때 경제 기적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며 ‘아시아의 다음 거인’이 되리라는 기대를 받았던 한국은 근래에 들어 퇴행해 가는 징후가 뚜렷했다. 산업의 성장동력은 떨어졌고, 일부 주력산업들도 허망하게 무너져 갔다. 경제성장도 주춤하고 있고, 청년실업은 늘어갔다.
그럴 때마다 정부가 옥죄고 비판했던 것은 나름 괜찮은 일자리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방만 경영을 비난하며 복지를 없애게 했고, 임금피크제를 앞세워 임금을 깎았다. 성과연봉제를 통해 사업장 내 조직의 분위기가 망가져도 더욱더 경쟁에 몰두할 것을 강요했다.
노동조합의 숨통도 함께 죄어 갔다. 노동시장 상황을 빌미 삼아, 지난 20, 30년간 노사관계의 민주적 진화를 거두며 형성시킨 제도화된 노조의 권한을 무력화시키려는 듯했다. ‘사회적 통념’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들이대며, 현행법에 반함에도, 노조의 동의가 없어도 근로자들에 불리한 쪽으로 취업규칙을 변경해도 된다고 역설했다. 노사가 체결한 단체협약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노조가 이기적으로 조합원들의 이익을 과도하게 추구해 일자리가 안 생긴다는 투로 비판하며,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시정명령을 내렸다.
박근혜 대통령이 언론에 직접 등장해 “시간이 없다”며, 위와 같은 내용을 담은 이른바 ‘노동개혁’을 주문하고 다그치던 게 바로 엊그제 일이다. 한데 알고 보니 같은 시간에 권력의 숨은 실세들은 유령재단을 만들고 대기업들에 성금을 낼 것을 강요했다고 언론은 전한다. 그렇다면 한편으론 대기업의 팔을 비틀어 돈을 뜯어내면서 다른 한편으론 주로 기업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공식적인 개혁의 내용을 채워갔다는 말인가. 도무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허망한 일이다. 이 시점에서 일반 국민은 물론이고 대통령의 명을 받들어 밤잠을 설치며 정책을 고민하고 방안을 만들려 노력해 온 수 많은 공직자들의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승만 정권은 약탈국가의 최후가 어떠한지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대통령 뒤에서 온갖 비리를 자행하며 자의적 권력을 행사하고 부정선거까지 도모했던 부통령 이기붕과 그의 처 박마리아는 시위대에 쫓겨 도망가다 자식이 쏜 총에 맞고 횡사했고 그 자식도 같은 총을 사용해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승만도 하야해서 하와이로 도망가 버렸다.
2013년, 국민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불쑥 나타나 4년간 나라를 도탄으로 몰고 간 한반도 남단의 ‘제2 약탈국가’는 속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한다. 국정농단 세력이 약탈의 수단으로 삼았을 수 있는 허망한 개혁놀음도, 땀 흘려 일하는 이들과 일할 기회를 찾고자 하는 이들 모두를 진정으로 위하는 쪽으로 다시 구상되어야 한다.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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