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주변에선 이번 최순실 사태가 ‘원만히’ 해결될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 모양이다. 여기서 ‘원만히’란, 권위는 크게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박근혜 대통령의 권한과 역할이 유지되는 선에서 일이 수습되는 걸 말한다. 우병우ㆍ안종범 수석과 ‘문고리 3인방’을 자르고, 일부 개각하고, 최순실 국정농단은 비리 차원에서 검찰 수사에 맡기는 식이면 연착륙도 불가능하지 않게 여겨질 수 있겠다.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다. 안됐지만,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박 대통령의 입지는 이미 붕괴된 상태다.
▦ 오랜 친구에게 연설문 표현 좀 보게 한 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하고 억울해할 수도 있다. “좀 더 꼼꼼하게 챙겨 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는 사과문엔 박 대통령의 그런 심경이 담겨 있다. 그런데 국민이 정작 경악하는 건, 대통령 연설문을 내돌린 사실보다도, 순수한 마음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여기는 박 대통령의 ‘순진함’이다. 국민은 그 순진함이 최순실 등의 국정농단뿐 아니라, 뜬금없는 수첩인사와 구호뿐인 엉성한 정책들, 미르ㆍK재단 사건의 근원이었다는 사실에 새삼 좌절하고 있다.
▦ ‘원칙과 신뢰’를 늘 강조해 온 박 대통령에게 진퇴의 결단에 도움이 될 만한 좋은 예가 유명한 워터게이트 사건이다. 미국 현대사를 뒤흔든 이 사건 역시 형사법적으로는 매우 사소한 일에서 시작됐다. 1972년 대선에서 닉슨 캠프 쪽 사람들이 워싱턴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던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붙잡혔다. 단순히 보면 형사법 위반 여부를 따져 범인들을 처벌하면 될 일이었다. 이런 단순한 인식은 “죄가 인정되면 처벌 받겠다”며 돌연 귀국한 최순실에게도 엿보인다.
▦ 하지만 재선 대통령이던 닉슨이 사임에 이른 건, 단순한 도청 범죄 때문이 아니다. 그걸 은폐하는 데 대통령이 가담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국민적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당시 범인들과의 관련성을 부인하고 잡아 뗐던 닉슨과 달리, 이미 최순실과의 관계를 시인했고, 그로 인해 국민적 신뢰 역시 더 볼 것도 없이 회복 불능 지경으로 무너진 상태다. 청와대는 박 대통령이 수석비서관 일괄 사표를 ‘지시’했다지만, 지금은 이미 대통령이 사태 해결을 주도할 수 없는, ‘대통령 유고’ 상황으로 보는 게 옳다.
장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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