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그대 없는 거리’ 등 블루스의 우울 기타로 연주
“주옥 같은 노랫말 사라진 건 책 안 읽는 세대 가벼움 때문”
지난 25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다섯 평 남짓한 지하 녹음실. 파란 수성펜을 들어 종이 위에 쓱쓱 사거리를 그리더니 “여기가 연세대, 이쪽이 지금 현대백화점이지? 그럼 이 중간 골목쯤이겠네”라며 자신이 그린 약도를 한참 들여다본다.
“3층? 4층이었나.” 어렴풋한 기억이 흘러간 세월을 대변했다. 1986년 신촌의 카페 레드 제플린을 설명하던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인 신촌블루스 리더 엄인호(64)의 눈이 이내 반짝거린다. “30평대 카페에 더 이상 손님을 못 받으니 바깥 계단에 스피커를 놔두고 사람들이 문 밖에서 공연을 봤을 정도였죠.” 이 카페에서 신촌블루스로 활동한 한영애, 김현식, 이은미, 정경화, 이광조 같은 가수들이 엄인호와 이정선의 기타 연주에 맞춰 블루스 특유의 우울한 정서를 노래했던 게 어느덧 30년 전이다.
당시 엄인호의 손끝에서 나온 ‘골목길’ ‘아쉬움’ ‘그대 없는 거리’ 같은 대표 곡들은 최근 ‘슈퍼스타K7’(Mnet)과 ‘응답하라 1988’(tvN) 등의 방송에서 다시 대중의 귀를 훔쳤다. 지난달 ‘듀엣가요제’(MBC)에 출연한 가수 현진영을 비롯해 오디션에 참가한 20대 가수지망생들이 재해석해 부른 ‘골목길’에 대해 엄인호는 “이미 나한테서 떠난 곡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라며 평가에 선을 그었다. 다만 “원곡에 비해 군더더기가 많아진 편곡과 기교가 아쉬울 때가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1980년대 청춘을 노래했던 동료들은 신촌블루스를 발판 삼아 솔로활동을 위해 떠났다. 엄인호만이 30년 동안 신촌블루스를 지켜왔다. 제니스와 김상우, 강성희 등 최근 몇 년 새 합류한 새로운 멤버들과 블루스란 장르는 물론 밴드 신촌블루스의 부흥을 꿈꾸며 지난 5월 30주년 기념앨범도 발매했다. 엄인호는 “모두 떠나버렸다”라면서도 한때 자신과 마음껏 청춘을 낭비했던 동료들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을 숨기지 못했다.
기타의 교과서 이정선, 음색으론 으뜸인 한영애, 의리로는 정경화, ‘필’(feel) 받으면 주체 못하는 이광조란 평가가 나왔다. 김현식이란 이름에선 60대의 카리스마 기타리스트도 여지없이 무너졌다.
1989년 김현식과 대구 공연에 올랐던 엄인호는 병색이 짙어지던 김현식이 노래를 부르기 힘든 기색이 역력하자 대기실에 있던 한영애 등 동료들을 모두 무대 위로 불렀다. “다같이 ‘사랑했어요’를 열창하니 관객도 울고 현식이도 울었지…”
어린아이처럼 굵은 눈물을 떨어뜨리던 엄인호는 “다음 공연에 자기를 안 부르니까 ‘왜 나 뺐어?’라며 전화가 왔다. ‘너 아프잖아’라고 했더니 ‘잘 먹고 잘 살아라’하고 끊었다. 그게 김현식과 나의 마지막이었다”며 “달라던 곡이라도 많이 줄걸. 그럼 나도 이 고생 안 했을 텐데”라며 허허 웃었다.
자신의 음악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밥 딜런의 최근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해선 “너무 늦은 상”이라며 “시 같은 노랫말로 세상을 말하고 세상을 변화시킨 뮤지션”이라며 치켜세웠다. ‘주옥 같은 노랫말’이 사라진 현재 대중가요계에는 “책을 읽지 않은 세대의 가벼움이 가장 큰 문제”라고 일침을 놓았다.
들고 다니는 휴대폰은 여전히 구형 2G폰, 어깨에 닿는 긴 머리카락은 아직 자를 생각이 없다. 그를 강단에 부른 대학의 요청은 번번이 거절했다. “난 늘 실수하는 사람이거든요. 누굴 가르칠 사람이 못 돼요.”
내달 신촌블루스 30주년 콘서트를 앞둔 장발의 기타리스트는 명성에 걸맞지 않은 표현으로 자신을 한사코 낮췄다. “난 엉터리 기타리스트예요. 굳이 높이자면 마구리(엉터리의 속어)의 거성이랄까(웃음).”
조아름기자 archo120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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