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다.”
‘에너지 민주주의’를 집필한 이이다 데츠나리(飯田哲也) 일본 환경에너지정책연구소(ISEP) 소장의 일성이다. 이이다 소장은 현대 사회가 모든 에너지를 석유로 환산하면서부터 오히려 에너지의 폭이 좁아졌다고 지적하며, 이것이 에너지 수급 전망이라는 경직된 형태로 나타났다고 보았다. 결국 단일화되고, 전문화된 에너지 시스템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에너지 미래상에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소위 ‘전문가주의’라고 말하는 함정이다.
물론 세상은 변하고 있다. 정보통신기술이 발전하면서 일반 시민들 역시 에너지 정책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온라인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도 쉬워졌다. 그러나 아직은 딱 거기까지다. 우리나라의 에너지정책은 여전히 소수의 경제학자와 정치가들이 좌지우지하고 있고, 현재 에너지 수급 능력에 따라 미래를 전망해 거기에 맞춰 정책을 꿰맞추는 형태는 여전하다. 탈핵, 기후변화대응 추세에 따라 태양광 등 기존에 홀대받던 재생가능에너지도 확대될 계획이지만, 어디까지나 구색에 불과하다. 중심엔 석탄화력과 핵발전이 있다.
에너지 정책에 의견을 낼 수 없는 다수가 석탄화력과 핵발전이란 에너지를 선택했을 리는 만무하다. 경제발전이 지상목표였던 지난 시기에는 규모의 경제가 필요했다는 주장을 수용하더라도 2040년, 2050년까지 화력과 핵발전을 계속 확대하겠다는 현 정책에 대놓고 동의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올해는 특히 초미세먼지 문제와 울산 지진 등을 경험했던 시민들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나설 가능성은 더욱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왜 정책은 변화가 없는가. 무관심의 문제가 아니다. 정보와 참여 방식이 제한적이라는 게 걸림돌이다.
재생가능에너지로의 전환이 가파르게 이루어지고 있는 독일은 전환의 주도권이 일반 시민들에게 있다. 메르켈 정부가 후쿠시마 사고 이후 거침없이 탈핵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도 시민들의 선택에 의한 결과로 봐야 한다. 독일의 재생에너지 설비의 46%는 일반 시민들의 투자로 설치된 시민 설비다. 반면 에너지 공급사에 의한 생산은 21%에 불과하다. 정책결정권자 대신 시민들이 사실상 정책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튀링겐 주는 아예 ‘시민에너지프로젝트’를 내놓으며,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에너지”라는 슬로건을 내걸기까지 했다. 영국 역시 ‘공동체 에너지 전략’을 내놓으며 중앙집중화된 에너지 생산 시스템이 아니라 각 지역의 시민들이 참여하고 주도하는 재생가능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생산 시스템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우리나라 역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서울시는 원전하나줄이기 정책을 펴면서 시민사회가 대거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놨다. 그 결과 일반 시민들의 결합도가 높아져 조기에 정책 목표를 달성하는 결과를 얻었다. ‘서울에너지공사’로 전환을 앞둔 ‘sh 집단에너지사업단’은 아예 시민위원회를 조성해 시민들을 공사의 사업 수립에 참여시킨다는 계획을 내놨다. 공기업이 전문가 중심의 자문위원회가 아닌 일반 시민들의 의견을 경청하기 위해 시민위원회를 두겠다는 것만으로도 변화의 크기가 감지된다. 2015년 전주시는 에너지정책연구소와 전주시민들이 함께 만든 ‘전주시 에너지대안시나리오’를 적극적으로 행정에 반영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볼 때, 정책 결정 과정에서 소외된 90%의 귀환은 매우 중요하다. 일방통행식 행정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게다가 언급한 사례들이 에너지 계획을 전망의 수단이 아니라 목표달성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흐름에 따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흐름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참여가 거대한 전환을 만들고 있다. 바야흐로 ‘우리의 시대’다.
이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전 에너지시민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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