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리, 정감만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긴 거리다. ‘대청호 오백리길’은 대전 청주 보은 옥천 4개 시도가 대청호 둘레를 따라 낸 걷기길이다. 정확히는 227km, 약 580리다. 대전시 구간만도 6개 코스 72.5km에 달해 드라이브 코스로도 결코 짧지 않다.
▦억새와 물안개 피어 오르는 ‘호반낭만길’
여행길에 서두르는 게 내키지 않지만, 꼭 그래야 할 경우가 있다. 일출을 봐야 할 때가 그렇고, 물안개를 보고 싶은 경우도 새벽 길을 나서야 한다. 동이 트기 전 대전터미널 부근 숙소에서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대청호 오백리길 4코스 ‘호반낭만길’, 오백리길 중에서 대전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구간이다.
시내 날씨는 더없이 쾌청해 안개는 글렀구나 싶었는데, 경부고속도로 옛길 구 대전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고 있었다. 터널 안까지 파고든 안개에 시계는 점점 좁아 들었다. 첫 번째 사거리인 비룡교차로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주산동 마을 도로 옆 주차장에 차를 대고 호수 가까이 내려갔다. 카메라를 든 두 남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전에서 사진동호회 활동을 하는 윤모씨는 이맘때쯤이면 1주일에도 몇 차례씩 이곳을 찾는단다. 대청호만큼 새벽안개가 운치 있고 아름다운 곳이 드물다는 얘기도 덧붙인다. 이곳에서 찍은 사진은 더러 공모전에 출품도 하고, 전시회도 열어 대청호를 알리고 있다.
버드나무와 억새가 어우러진 마을 어귀 습지에서 끝없이 안개가 스며 나온다. 특수효과 기기에서 내뿜는 것처럼 수면 위를 미끄러져 하염없이 호수 중앙으로 이동한다. 고요할 줄만 알았는데, 호수는 부드러우면서도 생동감 넘치게 살아 꿈틀댄다.
곁에는 쪽배 2척이 안개 낀 호수의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어로 허가를 받은 주민들이 사용하는 배다. 해가 떠오르고 수풀의 윤곽이 드러날 즈음 한 남성이 배에 올라 천천히 노를 젓는다. 그 사이 다른 한 명은 카메라를 챙겨 재빨리 촬영포인트로 이동한다. 사진 작가들의 열정이 대청호에 또 하나의 풍경을 그린다. 물론 쪽배는 주인에게 허락을 받았고, 노는 직접 제작해서 차에 싣고 다닌단다. 본업은 따로 있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자 두 사람은 출근을 해야 한다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곳에서 호수를 따라 연결된 도로(대청호수로)를 2km 가량 이동하면 추동마을이다. 1988년 충남 대덕군이 대전직할시로 편입되기 직전 펴낸 ‘속 대덕군지’에 따르면 가래나무가 많아 가래울이라고도 불렸던 곳이다. 대청댐 건설로 물에 잠기게 된 동면사무소와 동명초등학교, 우체국 등이 이전한 제법 큰 마을이다.
오백리길을 조성하면서 마을 앞 도로변에 주차장과 호수전망대를 갖췄고, 데크 산책로를 따라 이동하면 대형 습지공원으로 연결된다. 곧 걷힐듯하던 안개가 억새와 갈대가 어우러진 습지 위로 다시 한번 스멀거린다. 갈대 이삭보다 먼저 핀 억새 군락 위로 이따금씩 날아 오르는 물새가 희뿌연 안개와 어우러져 수묵화를 그린다. 호수를 둘러싼 산세가 만만치 않은데도 이토록 평온하고 푸근한 것 또한 대청호만의 매력이다.
추동습지에서 약 300m를 이동하면 도로 옆에 드라마 ‘슬픈 연가’ 촬영지 표지판이 나온다. 권상우과 김희선 주연으로 2005년 방영한 드라마다. 주차장에서 두 주인공이 어린 시절 추억을 쌓은 오두막집이 있던 장소까지는 1.3km, 입구의 버드나무 군락을 지나면 좌우로 계속해서 억새길이다. 가을볕에 피어나는 솜털처럼 산책로도 부드럽고 따스하다. 호숫가 집이 있던 자리엔 오두막 모형으로 의자 겸 안내판을 세웠다. 잠길 듯 말 듯 자그마한 섬과 드넓게 펼쳐지는 호수가 배경이면 누구라도 절로 아름다워질 듯하다. 이곳은 수위가 낮아질 때마다 만들어지는 층층의 곡선이 또한 매력이다.
드라마 촬영지를 산책한 후 추동습지로 되돌아 나왔다. 습기를 머금었던 하얀 억새 꽃이 잔잔한 호수에 투영돼 물결 따라 살랑거리고, 따사로운 오후 햇살에 또 하나의 가을이 눈부시게 피어 오른다.
▦대청호 오백리길 드라이브 추천 코스
대청호는 국내에서 3번째로 큰 규모인데도 소양호나 충주호처럼 정확한 위치가 퍼뜩 떠오르지 않는다. 1981년 댐을 완공할 당시 기준으로 충남 대덕군과 충북 청원군의 머리글자에서 따온 이름이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따져 대전시와 청주시의 앞 글자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댐은 대전 대덕구와 청주 서원구 사이 금강을 가로막고 있다.
대덕군 동면 직동리(현 동구 직동)가 고향인 전모(62)씨가 기억하는 수몰 전 금강변 내탑마을은 대전의 대표적 유원지였다. 신탄진수영장, 옥천 장계수영장과 함께 금강의 3대 수영장이었던 내탑수영장 모래사장은 부산 광안리해수욕장보다 넓었고, 여름 휴가철이면 원두막까지 웃돈을 받고 숙소로 내줬을 정도로 피서객이 인산인해를 이룬 곳이었다.
그 모든 기억을 대청호에 내준 2만 6,000여명의 수몰지역 주민들은 멀게는 아산과 대전 등지로 이주했고, 많은 수는 원래 마을에서 물이 차지 않는 곳으로 조금 올려 자리잡았다. 해안가 마을이 그렇듯 구불구불한 물길 따라 한 구비 돌 때마다 호수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대전구간 대청호오백리길은 바로 이 마을과 마을로 연결돼 있다.
동구 추동마을에서 대덕구 대청댐까지 드라이브를 계획한다면 빠른 길로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에 의존해서는 제대로 호수를 볼 수 없다. 아래 순서로 지명이나 주소를 입력하면 한적한 시골길을 천천히 달리며 가을빛 담뿍 담은 대청호를 즐길 수 있다.
①관동묘려(동구 마산동 96), 열녀로 칭송 받은 은진 송씨 송유(1398~1446)의 어머니 류씨 부인의 재실이다. 바로 옆 ‘은골 할먼네집’은 민물새우탕을 잘 하기로 이름나 있다.
②직동전망대(동구 직동 산 70-1), 관동묘려에서 냉천로를 따라 북측으로 이동하다 ‘사진 찍기 좋은 명소, 800m’라는 안내판에서 우회전 한다. 산등성이 주차장에 차를 대고 조금 오르면 대청호의 여러 섬들이 다도해처럼 보이는 전망대다.
③찬샘정(동구 직동 산32-9), 냉천로에서 그나마 고도가 높은 곳으로 길가에서 대청호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정자 ‘찬샘정’이 세워져 있다.
④찬샘마을(동구 직동 676), 신라군과 백제군의 치열한 전투로 피가 내를 이뤘다는 유래에서 피골 혹은 직동(稷洞)마을로 불리다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다양한 농촌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chansaem.com
⑤삼정마을(대덕구 삼정동 18), 삼정승이 날 거라는 기대로 이름 붙인 마을. 정승은 나지 않았지만, 호수 맞은편이 대통령의 별장으로 이용하던 청남대다. 마을 앞 습지공원이 아담하고 포근하다.
⑥로하스가족공원 캠핑장(대덕구 대청로 424번길 200), 오토캠핑장과 캐러밴, 글램핑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풋살 경기장 옆 전망대에서 대청호가 드넓게 펼쳐진다. www.camplohas.com
대전역에서 추동마을까지는 약 10km, 승용차로 20여분 거리다. 대중교통은 KTX 대전역에서 60번, 지하철 판암역에서 61번 버스가 운행한다. 대전시티투어(www.daejeoncitytour.co.kr) 버스도 11월과 12월 매주 일요일 오후 1시 대전역을 출발해 대청호오백리길 코스를 운행한다. 해설사가 동행해 3시간 40분간 진행한다.
대전=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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