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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21세기 소년을 희구하며

입력
2016.10.25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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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전, 내가 하루속히 이곳을 떠나 유학을 나가야겠다고 다짐했던 순간이 있었다. 대학교 화장실 낙서를 봤을 때였다. 남자 화장실 문 안에는 딱 두 종류의 낙서들로 가득했다. 저질스런 음담패설이 적혀있지 않으면 각 대학, 학과의 수능점수 커트라인 운운하며 온갖 카스트의 피라미드를 그려놓았다. 그 학교가 원래 그렇지는 않았다. 그보다 10년 더 전인 90년대 중반에는 같은 장소의 벽에 시가 쓰여 있었다. 연애에 대한 문학적 토로가 아니면,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담겨 있었다.

군대에서 복학하고 돌아온 2000년대 캠퍼스의 풍경은 참으로 낯설었다. 생경했던 풍경 중 하나는 만우절 이벤트였다. 4월 1일이 되니 학부생들이 온통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캠퍼스를 돌아다녔다. 새로운 풍조라고 했다. 무지몽매(?)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을 겪었지만, 대학생이 되었으니 이젠 지성인답게 처신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공감대 속에 서로를 존중하고 ‘고딩’ 문화를 경원시했던 우리 때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러운 퇴행으로 여겨지지 않는 듯했다.

돌이켜보면 다른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교수와 학생의 관계도 심히 변했다. 학생사회가 강했던 시절에는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다. 오히려 많은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버릇이 없고 교수들에게 마구 대들었다. “선배들 그러시면 안 되는데…” 하던 나에게 “너는 애가 숫기가 없다”고 학부 선배가 핀잔을 줬던 기억이 난다. 복학하고 나니 그 선배들 조금 위의 세대가 교수로 임용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체로 정년퇴임을 앞둔 보수적인 교수들보다 더 권위주의적이고 공격적이었다. 이제는 그래도 되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장 자신들이 편할 수 있는 시대가 되기도 했다.

경쟁과 가시적인 성과가 강조되고 IMF 외환위기 이후의 두려움이 사람들 가슴을 옥죄면서, 교수나 학생이나 외견상 ‘공부’는 더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학점에만 목을 메는 학생들의 온갖 행태도 전염병처럼 퍼져갔다. 그러나 그런 공부는 생각, 탐구, 질문, 비판이 없는 단순노동, 혹은 흉내내기 내러티브에 가까웠다. 그 속에서 대학원생들은 논문 찍어내기 아니면 교수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기계가 되어갔다. 학문의 열정을 품은 소년의 영혼은 안 보이고, 좁은 상아탑 안에서 ‘왕 노릇 할 수 있는’ 기회와 분위기에 이어지기 위해 눈알을 번뜩이는 군상들이 늘어갔다. 좋은 사람을 대학원에서 찾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기실 이런 퇴행적인 모습은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외국에 나가보니, 거기도 가장 우수하고 교양 있는 인재들이 아카데미로 잘 들어오지 않으려 했다. 상대적으로 적은 물질적 보상을 넘어서는 지식 탐구의 가치에 대한 공감대가 엷어지는 글로벌 시대상을 보게 됐다. 요즘도 종종, 문명의 쇠퇴가 이런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실천적인 인텔렉츄얼 리더십(intellectual leadership)이 공허해진 시공간에는 온갖 협잡꾼들의 권모술수와 중상모략, 얄팍한 지식 마케팅이 판을 친다. 지식인의 뻔뻔한 교태와 대중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우매도 그 속에서 창궐한다.

일본 만화가 우라사와 나오키는 그런 암울한 시대상이 치닫는 모습을 만화 ‘21세기 소년’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사이비 신도들이 정당과 비선조직을 만들어 혹세무민하고 권력을 잡는다. 감시사회와 권위주의가 강화되고,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멈춘 채 하루하루를 억지로 즐거운 척하며 살아간다. 정치적 리더인 ‘친구’가 그들 대부분을 대량학살로 몰아가는 와중에도. 만화에서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저항하고, 상식과 질서를 회복한다. 아마도 현실에서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그와는 다를 것이다. 한두명의 초인적 영웅이 아닌, 21세기를 사는 수많은 소년(소녀)들의 상식과 지혜, 그리고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김도훈 아르스프락시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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