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불(生佛)’
태국 국민들 사이에 살아있는 부처로 통했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지난 13일(현지시간) 서거했다. 그는 윤리적인 생활과 국민에 대한 헌신, 정치적 권위로 재임 기간 70년 동안 태국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만큼 태국 국민들은 비통한 심정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국민을 사랑한 국왕
푸미폰 국왕은 1782년 짜오 프라야 짜끄리(라마 1세)를 시조로 하는 현 짜끄리 왕조의 아홉 번째 왕, 즉 라마 9세다. 그는 즉위한 지 1년 만에 의문의 총격 사건으로 숨진 형 아난타 마히돈(라마 8세)의 뒤를 이어 1946년 6월 9일 왕위에 올랐다. 태국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왕이자 현존하는 국왕 중에 전세계 최장기간 재위한 군주였다. 푸미폰 국왕의 서거로 그보다 한 살 많지만 1952년 즉위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최장기 재위 군주 타이틀을 이어받게 됐다.푸미폰 국왕은 1927년 태국 마히돈 아둔야뎃 왕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미국 하버드대에서 공중보건학을 공부할 당시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다.
푸미폰 국왕은 스위스에서 중등 교육을 받고 로잔대에서 과학을 공부하던 중 두 살 연상의 형이 21세 나이에 의문의 총기 사고로 숨지자 왕위를 계승했다. 즉위 직후 삼촌인 랑싯에게 섭정을 맡기고 로잔대로 돌아가 학업을 마친 뒤 1950년 5월 공식 대관식을 가졌다. 랑싯이 숨진 다음 해인 1952년부터 푸미폰 국왕은 본격 통치를 시작했다.
푸미폰 국왕은 특히 윤리적이고 국민을 위해 헌신한 삶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는 태국 정치에서 고질병처럼 여겨지는 부정부패 스캔들에 단 한 번도 연루된 적이 없었고 사생활도 깨끗했다.
그는 관행이던 국왕의 일부다처제도 이어받지 않았다. 그는 1970년대에 매년 200일 넘게 카메라와 지도, 수첩을 들고 고산지대를 여행하며 국민의 고충을 직접 체험했고 태국판 새마을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국왕 개발 계획’을 실행했다. 농촌 지역의 수력발전소·저수지 건설, 가난한 농민에게 물소를 빌려주는 물소은행 설립, 농업 기술 연구소 개설 등 3,000여 개의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 그는 또 왕실의료단을 조직해 의료진이 오지를 돌아다니며 국민을 돌보게 했다.
이런 푸미폰 국왕의 공로는 추후 전세계의 인정을 받았다. 1988년 푸미폰 국왕은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 상을 받았고 2006년 유엔 인간개발 평생업적상도 받았다. 당시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은 푸미폰 국왕이 “신분과 종족, 종교를 초월해 극빈자와 취약 계층을 위해 헌신했다”고 평가했다.
정치적 중재 vs 민주주의 발전 저해
하지만 정치적 업적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수많은 쿠데타와 정치 불안정 속에서도 중심을 잘 지켰다는 평가와 쿠데타를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며 민주주의의 발전을 지연시켰다는 비판이 교차하고 있다.
태국 역시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국왕은 상징적 존재다. 하지만 국가의 정치적 고비마다 푸미폰 국왕이 나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
1973년 그는 방콕에서 군부독재 정권에 대항한 민주화 시위로 대학생 등 4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군부정권의 총리와 핵심 추종자들에게 “민주주의와 국민을 위해서 태국을 떠나라”고 요구했다. 국왕의 요구는 결국 당시 타놈 군부정권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됐다.
1992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수친다 크라프라윤 당시 총리와 야권을 대표하는 잠롱 스리무리앙 전 방콕 시장이 크게 대립했을 때에도 푸미폰 국왕이 나섰다. 그는 두 사람을 왕궁으로 불러들여 무릎을 꿇리고 질책했다. 이후 수친다 전 총리는 국왕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해외 망명길에 올랐다.
2006년에도 푸미폰 국왕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던 탁신 칫나왓 당시 총리를 몰아낸 쿠데타를 승인했고 2014년 5월에 탁신의 동생 잉락 친나왓 총리가 이끄는 정부를 뒤엎은 군부 쿠데타를 닷새 만에 승인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에서 태국을 구하려는 용단이라는 시각과 민주주의의 훼손이란 의견이 교차한다
구심점 잃은 태국 격랑 속으로
이제 왕위는 푸미폰 국왕의 장남 왕치라롱껀(64) 왕자에게 승계될 예정이다. 그는 1972년 타계한 푸미폰 국왕으로부터 왕세자이자 후계자로 공식 지명됐다.
하지만 왕치라롱껀 왕세자의 앞날이 순탄치 만은 않을 전망이다. 우선 왕세자를 향한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푸미폰 국왕과 달리 왕세자는 잦은 기행과 이혼 등 문란한 생활로 국민의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최근 셋째 부인이자 전 왕세자비인 스리라스미와 친인척이 저지른 비리로 국민들의 신뢰가 바닥까지 떨어졌다. 푸미폰 국왕조차 과거 “왕세자는 명예롭지 못하며 도덕성이 부족하다”며 “그가 왕이 된다면 혼란이 국가를 집어삼킬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왕실과 군부세력이 왕세자의 승계를 달가워 하지 않고 있다. 쁘라윳 짠오차 총리가 이끄는 태국 군부는 와찌랄롱꼰 왕세자가 과거 탁신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 최근 이코노미스트지는 “탁신과 그의 지지세력은 왕치라롱껀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현재 추방당한 탁신을 사면하고 정계로 다시 불러들일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여기에 차끄리 시린톤(61) 공주도 변수다. 시린톤 공주는 푸미폰 국왕의 둘째 딸이자 왕치라롱껀 왕세자의 동생이다. 시린톤 공주는 태국 국민들 사이에서 ‘쁘라텝’(천사 공주님)이라 불리며 푸미폰 국왕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푸미폰 국왕의 다비식(茶毘式) 준비를 맡은 공주는 최근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기아 없는 세상'(zero hunger) 특별대사직을 맡는 등 대외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그녀는 왕위계승서열 2위다. 태국은 1974년 헌법 개정으로 여성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때문에 국왕의 부재로 태국은 당분간 정치적 혼란에 휩싸일 것으로 전망된다. 후계자의 왕위 승계 과정에서 2014년 쿠데타를 통해 과도정부를 수립한 군부 지지세력, 쿠데타로 물러난 탁신 친나왓 전 총리 지지세력 등의 갈등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왕실도 예전 같은 구심점 역할을 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절대적 권위의 국왕 부재와 왕위 후계 계승 문제로 당분간 태국은 적지 않은 혼란이 예상된다.
강희경기자 kst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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