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냉면 먹으라고 했잖아! 누가 계란 먹으래!” 고깃집에서 데이트하던 남자가 갑자기 돌변해 여자의 머리를 가격한다. 순간 너무 어이가 없어 놀란 표정만 짓는 여자. 남자가 때린 이유가 가관이다. 자신이 시킨 냉면을 권했을 뿐인데 여자가 그 안에 계란을 먹었다는 거다. 화를 참지 못 한 두 사람은 고성을 질러대며 최악의 하루를 보낸다. tvN ‘코미디빅리그’(코빅)의 코너 ‘러브 이즈 뭔들’의 한 장면이다. 개그맨 양세찬과 장도연은 소개팅으로 처음 만난 남녀로 분해 폭력과 폭언이 난무하는 데이트 현장을 보여준다.
또 다른 에피소드. 처음 만난 사람과도 키스할 수 있다는 여자의 말에 남자는 갑자기 혀를 날름거린다. 여자는 손바닥으로 남자의 뺨을 때리고 폭언을 이어간다. “혀 집어 넣어요. 싹 뽑아버리기 전에. 혀 뽑으면 죽는 거 아시죠?”
데이프 폭력, 여성혐오 쏟아내는 개그
뺨 때리기는 기본. 강제 키스도 예사로 하는 데이트 폭력 장면이 웃음을 핑계 삼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전파를 타고 있다. 우스개로만 받아들이기엔 폭력성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비판이 쏟아진다.
공영방송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KBS2 ‘개그콘서트’(개콘)는 비정상적인 커플을 내세워 폭력과 함께 여성혐오(여혐)까지 조장하고 있다. 오나미 안일권 등이 출연했다가 최근 막을 내린 코너 ‘그녀는 예뻤다’는 남자가 다짜고짜 여자에게 강제 입맞춤하는 장면이 매주 안방에 전해졌다. 여자는 역시 남자가 자신을 무시한다면 신발 등으로 무차별 폭력을 행사한다. 이런 폭력의 악순환은 다른 코너 ‘빼박캔트’가 이어 받았다. 운동하는 여자들에게 한 눈 파는 남자에겐 여자친구의 일명 ‘3단 콤보’ 폭행이 이어진다. 멱살을 잡고, 생수로 ‘물따귀’를 날리며, 생수통으로 머리를 내리치는 행위다.
여자가 방심한 사이 남자가 기습적으로 입술을 덮치고, 대답 않는 여자에게 “야! 야!”를 남발하며 손찌검을 하려는 남자들의 행태(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종방 코너 ‘러브 다이너마이트’)도 버젓이 전파를 탔다.
데이트 폭력의 대상이 대부분 여자라는 점은 더 심각한 문제다. 앞서 열거한 프로그램에서 여자는 비싼 명품을 좋아하고, 배려나 온정은 없으며, 돈 많은 남자에 속절없이 빠져드는 존재들이다. 자신의 물적 욕망이 충족됐을 때 남자를 왕처럼 떠받들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남자를 향한 가차없는 면박과 폭언, 구타가 행해진다. 지난 몇 년 동안 이런 상투적인 묘사에 대한 지적이 꾸준히 있어 왔으나 개선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비호행’ ‘님은 딴 곳에’ ‘빼박캔트’(이상 ‘개콘’) 등과 ‘오지라퍼’ ‘러브 이즈 뭔들’ ‘핼머니’ ‘자매들’ ‘그린라이트’(이상 ‘코빅’) 등의 코너는 여성 혐오나 여성 비하를 웃음의 소재로 삼아 왔다.
사회풍자 개그 사라지고 방송사 자정능력까지 상실
데이트 폭력과 여성 혐오 묘사 등에 대해 비판이 쏟아져도 바뀌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방송사의 자정능력 상실을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한석현 YMCA시청자시민운동본부 팀장은 “제작진의 자체 판단보다는 제작국이나 심의실, 방송사 차원에서 (문제 장면을)걸러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심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심의실의 구성도 문제다. 방송사 심의실은 대개 PD들이 심의위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제작자의 입장에서 방송을 볼 수밖에 없는 PD들에게 상식적인 수준의 심의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현실이다. 한석현 팀장은 “방송사가 자체적으로 자정작업을 할 수 없다면 시민단체 등과 심의실을 같이 운영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심의기관의 (지나치게 엄격한)규제를 피할 수 있고, 더 창의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이유에서다.
새로운 시도를 하기보다 관성대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안주하려는 제작 풍토도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개콘’과 ‘코빅’ ‘웃찾사’는 방청객을 앉혀두고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공개코미디 방식을 취하고 있다. 1999년 시작한 ‘개콘’은 17년 동안 포맷을 유지하고 있다. 오랜 포맷을 답습하다 보니 성공 확률이 높은 비슷한 소재를 재생산하다가 부작용을 낳고 있다. 현장 관객을 바로 웃겨야 한다는 강박도 선정적인 소재를 양산해내는 요인 중 하나다. 김경남 대중문화평론가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과정에서 논란거리는 충분히 걸러질 수 있는데 그런 여과 장치가 사라진 상태”라며 “정치풍자 개그가 사라지니 소재 고갈에 허덕이고 자극적인 요소에 기댈 수 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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