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중생의 이름은 리사였다. 나이는 열 다섯, 국적은 러시아, 사는 곳은 몽골 수도 울란바타르, 이방인과 영어로 의사 소통을 하던 그를 만난 곳은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이었다. 러시아 부랴트공화국 수도인 울란우데에서 태어나 사업하는 아버지를 따라 울란바타르에서 10년째 살고 있다는 그에게 러시아어는 모국어, 몽골어는 제1외국어, 영어는 제2외국어였다. 아니 몽골어도 모국어 이상이었다. 그가 사는 곳은 현대 최신 문명과는 거리가 있는 시베리아와 초원의 도시였지만 국제화 수준은 세계 상위 1% 수준이었다. 기차로 대한민국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지정학적 관점에서 보면 부럽기만한 노릇이다.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 호수를 끼고 울란우데를 거쳐 울란바타르까지 1,113㎞를 가는 기차는 꼬박 24시간을 잡아먹었다. 옆 객실에 할머니, 남동생과 같이 탄 리사가 잠시 말동무가 되어 줬을 뿐 잠에 취해 울란우데역을 구경도 하지 못했다. 아침 7시쯤 출발한 시베리아 횡단열차(TSR)는 울란우데에서 몽골 횡단열차(TMGR)로 이름을 바꾸고 저녁 7시쯤 국경 앞 마지막 역인 나우시키에서 섰다. 이제 국경만 넘으면 몽골이다.
기찻길은 이어지지만 이곳도 국경인지라 수속이 빨리 이뤄지지는 않았다. 승객들은 죄다 하차해서 체조도 하고, 수다도 떨며 기차 감옥의 해방감에 젖어있다. 말이 좋아 기차여행이지, 서너 시간 지나면 감방이 따로 없다.
해방감을 맛보는 것은 좋은데 기차 정차 중에는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차장의 안내방송은 둘째치고 자작나무 숲을 통과하면서도 단잠을 즐기던 승객들이 화장실이 급하다고 아우성이다.
얼굴이 노랗게 뜨기 시작한 승객 일부가 페트병을 찾더니 황급히 사라진다. 객실과 객실 사이 빈 공간에서 생리현상을 해결하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하품을 하며 어슬렁거린다. 그 와중에서도 누가 볼까 싶어 2인 1조로 보초까지 세웠다.
횡단열차의 배설물은 모두 레일 차지다. 달리는 열차에서 볼 일을 보고 페달을 밟으면 모두 밑으로 내려간다. 그나마 기차 속도 때문에 한 곳에 쌓이지 않고 분산된다. 자연으로 돌아가기는 하지만 느낌이 개운하지는 않다.
비행기는 배설물 처리를 어떻게 하는 지 두 딸에게 물었더니 고개를 갸우뚱한다. “비행기에서 볼일 본 후 버튼을 누르면 뭔가 쏵 빨려나가는 소리가 들리잖아. 그건 바로 공중으로 분사되는 거란다. 펑 뭉개뭉개~.” 옛날 어디서 들었던 풍월을 읊었다.
그래도 고개를 갸우뚱하는 딸들을 위해 항공사에 직접 확인했다. “과거에는 공중분사 방식으로 처리했는데 환경오염 논란도 있어서 탱크에 저장, 처리해요.” 그랬었구나. 기차도 그렇게 처리하면 굳이 정차역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이 없을텐데.
유라시아 대륙을 누비는 횡단철도는 손가락을 꼽는다. 시베리아, 몽골, 만주(TMR), 중국횡단철도(TCR)가 대표 주자다. 장거리열차는 24량으로 구성된 장대열차다. 러시아 국경을 넘기 전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식당칸으로 가는 길에 2인이 한 객실에 묵는 1등실 ‘룩스’와 4명이 들어가는 2등실 ‘쿠페’, 6명의 3등실 ‘쁠라즈까르따’를 골고루 볼 수 있었다. 같은 열차 감옥이지만 ‘유전’(有錢)과 ‘무전’(無錢)의 차이는 컸다.
소고기 김치찌개를 닮은 보르시와 커피 한 잔으로 끼니를 대충 때우고 터널 같은 통로를 따라 객실로 귀환, 또 깊은 잠에 빠졌다. 몽골땅으로 접어들면 보르시 맛을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국경을 넘으면서 식당칸과 기관차가 통째로 바뀌기 때문이다. 몽골 땅에서는 보드카 대신 마유주를 마셔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국경 수속은 조금 더 고약했다. 느닷없이 멍멍이가 객실로 뛰어들어 깜짝 놀랐다. 가방을 넣어둔 침대를 들어보라며 개를 투입했다. 마약견이다. 어느 국경이나 마약운반이 가장 골칫거리다.
신원확인은 군대 점호가 따로 없었다. 이름을 부르면 각자 한 명씩 객실 안쪽에서 문쪽으로 ‘차렷’해야 했다. 역무원들이 들어와서 여권과 얼굴을 대조해도 충분할텐데 꼭 승객을 불러 세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해서 침대 2층칸에서 내려가긴 했지만 썩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몽골서 러시아로 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차는 몽골의 밤으로 빨려들어간다. 몽골은 칭기즈칸의 나라다. 그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간 지 800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몽골하면 떠오르는 한 마디는 칭기즈칸이다. 이튿날 아침 7시쯤 울란바타르역에 도착, 도심으로 들어가는 길에도 먼 산에 그의 초상화가 보였다. 그가 없는 몽골은 상상할 수 없다.
칭기즈칸의 몽골군은 25년 동안 로마군의 400년 정복기보다 더 많은 사람과 땅을 지배했다. 전성기 몽골의 땅은 아프리카 대륙만큼 확장됐다. 아이러니하게도 30개국 수 억의 인구를 정복했던 몽골 부족의 인구는 100만, 그 중 군인은 10만명에 불과했다.
칭기즈칸은 실크로드 주변에 고립된 도시들을 점령, 길과 다리로 연결했다. 역참제가 가장 발달한 나라가 몽골이기도 했다. 암행어사가 차고다니던 마패, 말이 그려진 숫자만큼 탈 수 있었던 것도 역참제 덕분이다. 그 덕분에 실크로드는 거대한 자유무역지대로 자랐다.
몽골제국은 칭기즈칸 사후에도 150년이나 팽창했고, 제국 붕괴 후에도 그의 후손들은 칸, 황제, 술탄, 왕, 샤, 아미르, 달라이 라마 등 다양한 호칭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칭기즈칸의 후손 중 가장 마지막 통치자는 1920년까지 자리를 지켰던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의 알림 칸이었다. 소비에트 혁명은 칭기즈칸의 후손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가장 몽골스러운 특징 중 하나는 칭기즈칸의 무덤이 없다는 것이다. 피라미드는 아니더라도 대칸의 무덤에 기념비 하나 있을 법 하지만 작은 비석 하나 찾아볼 수 없다. 구전된 이야기에 따르면 그가 숨진 후 장례행렬에 속한 병사들은 비밀리에 그를 묻었다. 그리고 기병 800명이 땅을 다져 무덤의 흔적을 지웠고, 기병들은 다른 병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그 병사들은 또 다른 병사들에게 죽었다. 그래서 칭기즈칸은 800년 가까이 몽골의 풀밭 어디선가 편안히 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jhju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