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걷기왕’(20일 개봉)은 분명 유쾌하고 통쾌한 코믹영화다. 선천적 멀미증후군으로 차를 탈 수 없는 여고생이 경보에 도전한다니 설정부터가 웃음을 부른다. 배우들이 어떻게 코미디를 풀어놓을 지 궁금해지는 영화다. 촬영을 마친 배우들에게도 웃음의 흥이 남아있을 듯한데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주연배우 심은경(22)은 오히려 차분했다. 그럴 만도 했다. ‘수상한 그녀’(2014)와 ‘널 기다리며’(2016) 등으로 성인연기에 도전했던 그가 다시 여고생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일부러 여고생 역할을 피했던 것 아니었냐는 질문에 “맞아요”라는 솔직한 답변이 돌아왔다. “아역 때부터 활동해서 어린 이미지가 고착될까 봐 고교생 역할을 피했던 게 사실”이라고도 했다. 그는 “‘걷기왕’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잃어버렸던 감수성을 찾았고 다시 여고생으로 돌아온 이유”라고 설명했다.
심은경은 지난 몇 년 동안 변화를 시도했다. 올해 개봉한 영화만 봐도 그가 얼마나 다양한 역할에 목말라 하는 지 알 수 있다. 로봇의 목소리(영화 ‘로봇, 소리’)를 맛깔 나게 표현해 박수 받았고, 15년 전 아빠를 죽인 범인을 쫓는 희주(‘널 기다리며’)를 맡아 처음으로 스릴러 장르에 도전했다. 1,000만 관객을 모은 ‘부산행’에선 좀비가 된 채 기차에 올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일부러 같은 역할, 비슷한 이미지를 풍기지 않겠다고 작정한 듯했다. 심은경은 자신의 내면과 싸우는, 보이지 않은 “질풍노도의 시기였다”고 했다. 그는 “내가 배우로서 재능이 있나”하는 고뇌까지 했다.
“연기생활을 하면서 당연히 슬럼프가 온다고 생각해요. 어릴 때는 연기하는 게 마냥 행복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 개념이 달라지더라고요. 어떤 배우가 되어야 하나,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아, 결국은 마음이 편해야 내가 즐길 수 있구나’하는 초심을 발견하게 됐어요.”
‘걷기왕’에서 꿈도 열정도 없는, 그저 하루 4시간 동안 학교를 오가는 길이 가장 행복한 만복이의 이야기가 그에게는 신선한 자극제로 다가왔다. 만복은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경보를 시작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의지로 전국대회까지 출전한다.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없어 시골 집에서 꼬박 하루를 걸어 서울에 도착하기도 한다. 심은경은 “(시나리오를 보고)살짝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심은경은 주인공으로 나선 영화 ‘써니’(2011)와 ‘수상한 그녀’로 각각 730만 명과 860만 명의 관객을 모으면서 충무로 흥행 블루칩으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KBS 드라마 ‘내일도 칸타빌레’(2014)에서 시청률 4%라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며 “절정의 슬럼프”를 경험했고, ‘널 기다리며’도 100만 관객을 넘지 못 했다. 그럴 즈음 만난 ‘걷기왕’은 그에게 “‘내려놓음’을 알려준 작품”이었다. “‘수상한 그녀’로 굉장한 호응을 받은 뒤 흥행을 중요하게 여겼어요. 더욱 다양한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에 작품 선택에 예민한 때도 있었고요. 결국 큰 오산이었죠. 흥행에 대한 욕심 때문에 연기 중심을 잃게 되더군요.”
그렇다고 심은경의 도전이 멈춘 건 아니다. ‘반드시 크게 들을 것’(2009) 등으로 독립영화계에서 인정받은 백승화 감독과 작업하며 타성에 젖어 있던 마음가짐도 되돌아봤다. “관객 수보다 중요한 건 제가 하고자 하는 일에 중심을 갖고 흔들리지 않는 거예요. 후회 없는 노력으로 제 스스로 만족감이 컸을 때가 가장 행복하니까요.” 여고생으로 돌아간 그가 오히려 한 뼘 더 성장한 듯했다.
강은영기자 kis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