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한국 맥주, 북한보다 맛 없다” 기사 쓴 후
맥주 마니아 2명과 창업 ‘제3의 맥주물결’ 이끌어
전국 400곳 공급… 올해 투자사에서 30억원 지원
“수제 맥주 성지 美 진출 염두… 제조 공장도 인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인에게 커피란 ‘믹스커피’를 뜻했다. 가늘고 긴 봉투 한 쪽을 뜯어 쏟아낸 가루에 뜨거운 물을 타서 먹는 달달한 맛의 커피가 대부분이었다. 그랬던 커피 개념은 미국의 대형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가 물 건너 온 이후 대전환을 맞는다.
믹스커피는 사무실 한쪽 구석으로 밀려났고, 이제 사람들은 커피콩에서 짜낸 원액에 물을 섞은 ‘아메리카노’나 우유를 넣은 ‘카페라떼’를 마신다.
몇 년 전부터는 여기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아메리카노라고 다 같은 아메리카노가 아니다”라며 ‘스페셜티 커피’가 등장하면서다. 스페셜티 커피는 커피콩의 종류나 원액 추출 방식 등을 달리해 맛과 향을 차별화한 고급 커피다. 이런 스페셜티 커피의 인기를 두고 커피 업계에서는 ‘제 3의 물결’이라 불렀다.
최근 맥주도 커피가 밟아온 길을 따라가고 있다. 가장 흔하게 유통되는 국산 맥주가 믹스커피, 일본 독일 미국 등에서 수입한 맥주가 아메리카노라면 기호에 따라 골라 마실 수 있는 수제 맥주는 스페셜티 커피에 해당한다. 미국에서는 연간 생산량이 600만배럴 이하인 소형 양조장에서 맥아ㆍ홉ㆍ효모ㆍ물로 제조한 특색 있는 맥주를 수제 맥주(크래프트 비어)라 부른다.
최근 서울 이태원, 강남, 홍대 등 젊은 층이 많이 모이는 지역을 중심으로 수제 맥주 바람이 불고 있다. 맥주의 제 3의 물결을 이끈 것은 신생 창업기업(스타트업)이다. 대표적인 곳이 수제 맥주를 제조하면서 수입, 유통, 판매까지 하는 ‘더부스’다.
더부스는 서울 성수동, 강남 등에 8개의 매장과 경기 성남시 판교에 작은 양조장(브루어리)을 두고 있다. 직원 수는 90명 정도다. 전체 매장에서 하루 1,200~1,500잔의 맥주를 판다. 지난해 매출은 40억원이었고, 올해는 86억원으로 매출이 뛸 것으로 예상된다. 직접 개발한 맥주 수십 종은 더부스 매장뿐 아니라 대형마트, 전국 400여 곳의 술집에도 공급되고 있다. 더부스의 맥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대동강 페일에일’이다. 북한 맥주 이름에서 딴 것이다. 가수 장기하와 함께 개발한 ‘ㅋIPA’나 커피 전문점 빈브라더스와 손잡고 만든 커피 맛 맥주 ‘브루브로IPA’ 등도 인기다. 지난달에는 60여종의 수제 맥주를 한 자리에서 맛볼 수 있는 축제 ‘더 비어위크 서울’을 서울 건국대 인근에서 열어, 5일 동안 1만4,000명에게 수제 맥주의 맛을 전파했다.
지금은 직원 90명의 어엿한 회사로 성장했지만 더부스의 출발은 화려하지 않았다. 3년 전 ‘한국에는 왜 맛있는 수제 맥주 집이 없을까’ 아쉬워하던 맥주 마니아 3명이 ‘우리가 직접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1억2,000만원을 들여 서울 경리단길의 50㎡(약 15평) 남짓한 공간에 둥지를 튼 게 더부스의 시작이었다. 세 명의 공동 창업자 중에는 맥주와 관련한 유명 인사도 있다. 2012년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에 “한국 맥주가 북한 대동강 맥주보다 맛 없다”는 기사를 써서 맥주 업계를 긴장하게 만들었던 전 한국 특파원, 영국인 다니엘 튜더(34)다.
최근 한국을 찾은 튜더는 “이제 한국 맥주가 영국 맥주보다도 맛있어진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더부스의 창업 이후 한국의 수제 맥주가 대중화했다는 얘기다. 달라진 더부스의 위상은 올해 투자 받은 금액에서도 드러난다. 스타트업 투자사들의 관심은 주로 참신한 기술이나 서비스를 만든 정보기술(IT) 업체에 집중되기 때문에 더부스는 창업 초기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올해는 SBI인베스트먼트와 IBK캐피털 등 굵직한 투자사에서 30억원을 지원받았다. 튜더는 “한국에선 술집을 열어도 살아남기가 쉽지 않으니 투자를 더 꺼리는 경향이 있는데, 수제 맥주 대중화로 회사에 대한 인식이 좋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더부스는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 유레카 지역에 있는 맥주 제조 공장을 20억원에 인수, 연내 가동할 예정이다. 미국 공장은 한 달에 약 600톤의 맥주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이 공장을 사들인 것은 폭증하고 있는 국내 수제 맥주 수요를 맞추기 위한 것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수제 맥주의 성지’인 미국 진출까지 염두에 둔 전략이다. 직접 만든 ‘한국표 수제 맥주’가 “한국 맥주가 맛 없다”고 말했던 자신의 생각을 바꿔놓은 것처럼 외국인들의 입맛도 사로잡아 보겠다는 것이 튜더와 더부스의 목표다.
튜더는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한국에서 수제 맥주는 갈 길이 멀다”며 “한국 사람들도 ‘누구나 먹는 맥주’가 아닌 ‘자기 취향에 꼭 맞는 맥주’를 즐기게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서희 기자 sh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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