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발언은 매우 약한 수위’
교내 카톡방 성희롱 사건 비교
솜방망이 처벌 내린 학교 풍자
고려대에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인 도널드 트럼프의 음담패설을 ‘성폭력’으로 비판하지 말라는 대자보가 등장했다. 언뜻 성희롱 추문에 휩싸인 트럼프 발언을 옹호하는 의미 같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교내 ‘메신저 대화방 성희롱 사건’을 미온적으로 처리한 학교 측을 풍자하는 내용이어서 눈길을 끈다.
14일 고려대에 따르면 최근 서울 성북구 학교 후문 게시판에 ‘사적 자리에서 한 농담을 성폭력으로 호도 말라–트럼프에 대한 인권유린을 멈춰 달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붙었다. 해당 게시물은 경제학과 정경포효반 공동학생회의 이름으로 작성됐다. 이들은 처음에는 “별것도 아닌 일을 죄다 성폭력이라고 규정하는 일부 불편러(불편함을 표시해서 다른 사람들의 동조를 이끌어내는 사람)들 발언은 어이가 없다”며 “친한 남자들끼리 이런 말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말조차 하지 말라는 것은 지나친 사적 영역에 대한 침해다”며 트럼프를 두둔했다. 또 ‘혹시 키스를 시작하게 될지도 모를 경우에 대비해 입 냄새 제거용 사탕을 써야겠어’라고 한 트럼프의 말을 소개하면서 “이게 무슨 성희롱이고 여성혐오인가. 사적 장난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후반부에서 지난 6월 공개된 ‘고려대 카카오톡 대화방 성희롱 사건’을 언급하며 글 취지가 트럼프 옹호가 아닌 대학 당국의 안일한 사후 대처에 있음을 암시했다. 얼마 전 학교 측이 가해 학생 8명에게 2∼5개월의 정학 처분과 근신, 사회봉사 등 징계를 내린 것으로 알려지자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학내 여론이 비등한 상태다.
이들은 “카톡방 사건과 비교해도 트럼프의 섹드립(성적 내용을 담은 발언)은 매우 약한 수위”라며 “(트럼프가) ‘진따 새따(신입생과 성관계)는 해야 되는데’라는 말이라도 했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트럼프보다 심한 말을 1년 넘게 한 사람에게는 정학 5개월밖에 주지 않았다. 트럼프여, 대통령이 안 된다면 자유대한으로 오라”고 비꼬았다. 게시물을 작성한 정치외교학과 4학년 설동연(23)씨는 “가해자 대부분이 군에 가거나 휴학을 한 상황에서 이 정도 징계는 의미가 없다”며 “트럼프 망언 논란을 차용해 학교 당국의 부당한 처사를 대내외에 알리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학교 관계자는 “징계 수위가 낮다는 피해학생들의 반발이 있는 건 알지만 법 규정과 여론, 교육적 차원을 합리적으로 아우르기 위해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내린 결정”이라고 해명했다.
김현빈 기자 hbkim@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