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새 서구사회의 일상으로
안락사 신청 환자 확대 일로
“집에서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먹은 뒤 축구 경기 중계를 보고 있었어요. 오후 2시가 되자 남편이 ‘이제 합시다’라더군요.” 호주 노던 준주(準州) 다윈에 사는 주디 덴트는 20년 전 남편 밥(당시 66세)이 세상을 뜨던 순간을 덤덤하게 회상했다. 전립선암 환자였던 밥은 주 내 말기 환자들이 의사 도움 아래 합법적인 자살을 맞이할 수 있게 되자 자원하고 나선 첫 환자였다. 주디는 “남편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스러운) 여생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동의 서류에 서명하는 것보다 나은 완화 치료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했던 호주 노던준주는 비록 이후 연방 정부의 반대로 법을 폐기했으나, 안락사는 지난 20년간 미국, 스위스 등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확산돼 왔다. 불치병 또는 극한 고통과 싸우던 수많은 환자들이 약물 주입을 통해 스스로 죽음을 앞당겨 ‘안식’을 찾았다. 안락사는 생명의 존엄성을 격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격론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에도 일부 국가에서 새로운 일상으로 자리잡으며 죽음의 개념을 뒤바꾸고 있다.
미성년자도 가능...지지 여론 안정화
벨기에 연방 안락사위원회는 최근 불치병으로 인해 견디기 어려운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던 17세 청소년이 투약을 통한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다고 발표했다. 빔 디스텔만스 안락사위원회 대표는 “이례적인 사례였다”며 “다행히 안락사를 고려하는 어린이는 극소수지만 그렇다 해서 그들의 존엄한 죽음에 대한 권리를 우리가 거부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고 밝혔다. 2014년 2월 18세 미만의 청소년에게까지 안락사 권리를 부여한 벨기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전 연령대가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는 국가다.
안락사는 가장 진보적인 경우 미성년자에 허용될 정도로 세계인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와 여론조사업체 입소스모리의 공동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설문 대상 15개국 중 열세 곳에서 응답자 과반이 말기 불치병 환자의 안락사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의사가 약물을 투입해 환자의 목숨을 거두는 안락사, 말기 환자가 스스로 투약해 삶을 끝내는 ‘조력죽음’ 모두를 허용 중인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는 찬성률이 80%를 넘어섰다. 가톨릭교의 영향으로 둘 모두를 금지한 프랑스와 스페인도 찬성률 상위 4개국에 들어 파격적인 변화라는 평가가 이어졌다.
강력한 지지 여론과 함께 실제 안락사 및 조력죽음을 택하는 이들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벨기에에서는 합법화 첫 해인 2003년 235명에 머물던 안락사 환자 수가 지난해 2,021명으로 치솟았다. 호주에 이어 1997년 조력죽음 합법화가 시행된 미국 오리건주는 2013년 기준 한해 122명이 조력죽음을 위한 약을 처방, 71명이 실제 죽음에 이르렀는데 이는 전체 사망자의 0.21%에 해당한다.
죽음, 두려움 아닌 안식으로
조력죽음, 안락사 등이 늘어나면서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 또한 서서히 변화하는 모습이다. 지난 7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최초로 조력죽음을 위한 약 처방을 받은 로버트 스톤(69)은 “죽음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에 두렵지는 않다”며 “골수암으로 피로가 극심해지면 약을 복용할 계획이고 내 삶의 마지막을 제어할 수 있어 위안이 된다”고 소회를 밝혔다. 불확실한 죽음에 불안해하기보다는 스스로 시기를 결정해 여생에 활력을 되찾는 것이 더욱 가치 있다는 것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신적 지도자인 데스몬드 투투(85) 성공회교회 대주교도 지난 7일 자신의 생일을 기념한 미 워싱턴포스트 기고에서 “죽어가는 이들은 언제, 어떻게 이 세상을 떠날지 선택할 권리가 있다”며 “사람들이 존엄하게 죽을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조력죽음에 대한 찬성 의견을 밝혔다.
환자뿐 아니라 가족 등 지인들이 이들의 존엄한 죽음을 지지하는 데는 무엇보다 법제화의 영향이 지배적이다. 규정은 국가별로 상이하다. 벨기에, 네덜란드의 경우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 또한 조력죽음의 요건으로 인정하고 있어, 회복 가능성이 없는 우울증 환자까지도 해당된다. 미국은 오리건, 캘리포니아 등 6개 주에서 말기 불치병 환자에 한해 안락사 지원이 가능한데, 지원자가 이성적 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는 상태임을 검증하기 위해 정신과 전문의의 추가 진료를 의무화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신청 환자의 ‘정신 감정’마저 필요하지 않다는 급진적 주장도 나온다. 호주 조력죽음 합법화 운동을 주도 중인 필립 니치케 의사는 “개인적으로는 정신 평가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며 “이성적인 성인이 자신의 삶을 마치겠다고 결정했다면 사회는 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주장했다.
“안락사, 장애인에게서 희망 앗아가”
하지만 안락사, 조력죽음에 대한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아 옹호론자들을 딜레마에 빠뜨리고 있다. 영국 배우 겸 코미디언인 리즈 카르는 최근 가디언 기고를 통해 “조력죽음 합법화는 장애인에 대한 왜곡된 동정심을 부추겨 이들을 절망의 절벽으로 몰고 간다”고 주장했다. 카르는 안락사 계획을 밝힌 리우패럴림픽 휠체어 스프린트 챔피언 마리케 베르보트(38) 선수를 예로 들어 “아무도 베르보트에게 삶을 이어갈 가치가 있다고 설득하지 않았다”며 “우사인 볼트가 마지막 올림픽 후 목숨을 끊겠다 해도 같은 반응이었겠냐”고 지적했다.
베르보트 선수는 앞서 패럴림픽 종료 후 귀국해 안락사를 실행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나흘 만에 “2008년 의료진 도움을 받아 필요 서류를 준비한 것은 사실이지만 고통을 정말 참기 힘든 지경까진 가족, 친구들과 삶을 즐길 것”이라며 오보임을 밝혔다.
김정원기자 garden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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