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는 움직인다
송민순 지음
창비 발행ㆍ560쪽ㆍ3만원
세계 역사에서 북한 핵 문제만큼 난해한 협상이 있었을까 싶다. 1993년 6월 북한의 핵비확산조약(NPT) 탈퇴로 비롯된 북미간 뉴욕 회담에서 시작해 4자, 6자회담으로 이어진 북핵 문제는 긴장 고조와 협상, 합의와 파기, 교착을 반복하면서 장구한 시간이 흐른 지금도 끝을 가늠할 수 없다. ‘시시포스의 저주’를 재연하고 있는 북핵 문제는 미국, 일본의 저널리스트나 북한 전문가들이 발품을 팔아 파헤쳐온 미완의 소재이기도 하다.
6자회담 막전 막후 생생히 기록
北ㆍ美ㆍ中에 모두 균형잡힌 비판
그러나 우리 시각에서 북핵 문제와 협상 전모를 온전하게 다루지 못했다. 노무현정부 시절 6자 회담 수석대표로, 청와대 안보실장으로,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북핵 문제를 직접 다뤘던 송민순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의 외교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비핵화와 통일외교의 현장’은 그 아쉬움을 적잖이 해소한다. 협상 참여자로, 조정자로, 지휘자로 머리를 짜내고 분투하는 모습은 또한 4강의 틈바구니에 낀 이 나라의 위상과 역할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기에 읽는 이의 마음 한 켠을 답답하게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 평화체제 구축은 북한의 핵 포기를 핵심으로 한다. 저자가 한국측 수석대표로 4차 6자회담에서 합의를 이룬 2005년 9ㆍ19 공동성명은 그 청사진이다. 저자의 말을 빌면 남과 북이 한반도에서 공생하고, 미국과 중국 등 주변국의 이익이 상생하는 공존의 양식에 대한 합의다. 2년 뒤 핵 불능화를 핵심으로 한 구체적 이행계획서인 2ㆍ13 합의와 유엔 대북제재 결의안의 이론적 토대이기도 하다.
중간 휴식기를 포함해 53일간 진행된 당시 회담의 막전 막후는 숱한 에피소드가 담긴 한편의 협상 드라마나 다름없다. 미국, 중국, 북한 대표를 상대로 한 갈등과 좌절의 현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쟁점인 경수로 제공 문제와 관련해 북한의 집요한 요구와 워싱턴의 강경한 거부 속에서 협상이 수렁에 빠졌을 때 저자는 “인내의 한계를 시험 당하는 것 같았다”고 토로하고 있다. 중국 측 대표인 우다웨이에게 ‘핵폭탄과 함께 살아라’고 북한에 말해주라며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회담이 파탄지경에 이르자 저자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한국은 북한이 장래에 경수로를 가질 기회의 창을 열어두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미국의 반발로 사정이 걷잡을 수 없이 되면 자신을 교체하면 되지만, 기회는 대체할 수 없다는 전략적 사고에 따른 승부수였다. 강경파가 장악한 워싱턴을 움직여 마침내 미국이 입장을 바꿨을 때 “항공모함이 큰 곡선을 그리며 방향을 트는 광경과 같았다”고 저자는 회고했다.
국익의 방향과 목표가 다른 6자 당사국의 복잡한 이해관계는 회담 진전의 발목을 잡기 일쑤다. ‘네가 그렇게 하면, 내가 이렇게 한다’는 식의 행동의 선후를 철저히 따지는 북미의 자세 또한 그랬다. 신뢰의 부재 속에 북미간 통역 오류나 문구의 자의적 해석은 불신을 키우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됐다. 어렵사리 성사된 합의마저도 금융제재(BDA)나 우라늄 농축프로그램, 북한의 시리아 핵 이전 등 예상치 못한 암초에 걸려 좌초되는 게 예사였던 북핵 협상의 어려움이 회고록에 온전히 담겨 있다.
저자는 자국 이해에 기초한 원칙에 얽매여 결과를 중시하지 않는 관련 당사국의 완고한 자세에 진한 아쉬움을 드러낸다. ‘제논의 역설’처럼 협상카드를 끝없이 쪼개 상대를 심리적 피로에 빠지게 하는 북한과 대국의 자존심만 앞세우는 미ㆍ중의 자세에 대한 저자의 균형 잡힌 비판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주한미군 유연성 대통령과 논쟁
“내가 잘못 뽑았다” 말까지 들어
美 쇠고기 문제 등 뒷얘기 눈길
덧붙여 회고록은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까지 드러낼 정도로 솔직하다. 특히 노 대통령과의 의견 충돌은 아슬아슬할 정도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관련해 해외 투입 지역 논쟁이 벌어져 “내가 안보실장 잘못 뽑았네요. 그만합시다”라는 노 대통령의 말까지 들었다. 안보실장으로 임명된 지 1주일만의 일이다.
참여정부 임기 말 외교통상부 장관인 저자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30개월 미만 쇠고기 수입을 허용하는 방안을 미국에 던지자고 제안했을 때 노 대통령은 “피도 눈물도 없느냐”며 역정을 냈다. 미국에 부담의 공을 넘기자는 뜻으로 총리와 통상교섭본부장과 협의 하에 자신이 앞장섰지만 노 대통령은 정권이 넘어가게 되니까 각료들이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미국이 진의까지 캐물었던 ‘동북아 균형자론’(2005년 국정연설)과 관련해 노 대통령은 “(역내 국가들간의 역사적 반목과 경쟁을 극복하기 위한)촉매제 혹은 촉진자라는 뜻으로 알고 말했는데 그렇게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유엔 북한인권결의안에 대한 노무현정부의 입장이 찬성과 기권을 오가며 춤추게 된 전모를 비롯해 외교ㆍ안보 부처 간의 갈등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는 왕조시대 상소문을 올리는 심정으로 찬성을 촉구하는 자필 서한을 대통령에게 보냈고, 문재인 당시 비서실장, 백종천 당시 안보실장을 비롯한 기권파는 북한의 의사를 타진하자는 결론을 내린다. 저자는 “남북 관계를 좀더 진전시켜 두고자 하는 의지는 이해하나 이런 방식으로 남북관계의 허상을 쫓지는 말아야 한다”며 자괴감을 드러냈다.
책은 전시작전권 전환, 아프간 인질사건, 남북정상회담 등 저자가 경험한 다양한 외교 비사를 다루고 있지만 북핵 외교전이 뼈대다. 중국은 고비마다 북미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 않았고, 미국 역시 8부 능선을 넘지 않았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관계 개선 등 미국의 당근과 중국이 갖고 있는 대북 원유공급 중단 등 채찍을 결합시켜 10부 능선까지 가도록 하는 것은 한반도의 주인인 한국의 몫이라고 했다.
“제재는 게으른 사람들의 외교정책 수단”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1%의 타협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협상의 바닥까지 가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핵 위협에 대응해 군사력을 포함한 물리적 행동을 배제하지 않는다. 다만 중국, 러시아는 물론 우리 국민에게도 “할만큼 했다”고 말할 정도로 외교 수단을 다 소진해야 물리적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본다. 중국과 마찰을 빚고 있는 박근혜 정부의 사드(THAADㆍ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에 대해서도 “실제 배치될 경우 중국을 개입시켜 북한 핵을 협상으로 해결할 여지는 더 좁아지고, 반대로 북한의 행동 반경은 커질 것”이라며 “사드 배치 전에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협상의 문을 먼저 열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반도 문제의 해결은 긴 시간에 걸친 인내와 일관성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통일독일의 예를 들면서 한국이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정권을 초월하는 대북 정책을 만들고 모든 외교적 자산을 투입할 때 미국과 중국, 그리고 북한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송 총장은 “현장의 생생한 기록을 절제된 언어로 쓰자는 문구를 책상머리에 붙여 놓고 집필했다”고 말했다.
정진황 논설위원 jhch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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