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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경주지진과 김영란법

입력
2016.10.14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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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경주 지진은 온 사회를 불안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당시 경북지역 일부 학교에서는 ‘자리를 이탈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을 했는데, 학생들은 대부분 운동장으로 대피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학생들이 학교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생만 그런가. 기업을 믿지 못하는 소비자, 정부를 믿지 못하는 국민도 많다. 한 여론조사에서 우리 국민의 76%가 정부의 지진대처능력을 불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제 막 시행되기 시작한 김영란법도 사회적 불신의 산물이다. 공직자나 언론인, 교수들의 청렴성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제도적 장치다.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2015년 세계부패인식지수를 보면 우리나라는 세계 168개국 중 37위, OECD 국가 중 하위권이다. 우리 사회는 신뢰의 위기를 맞고 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을 믿지 못하는 건 비극이다. 공자는 사람이 신의가 없으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人而無信, 不知其可也)라며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돈보다 신뢰가 소중하다고 말하지만 신뢰를 쌓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신뢰는 사람 됨됨이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인데도 사람들은 눈앞의 이익 때문에 쉽게 신뢰를 저버리곤 한다. 문제는 신뢰가 눈에 보이지도 않고 검증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금융거래나 자산 정보 등 객관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개인 신용등급을 매긴다. 신용등급이 낮으면 대출도 못 받는다. 은행은 자선단체가 아니라 영리기업이기에 돈을 빌려줄 때 신용을 평가하고 담보를 요구한다. 담보라는 제도도 사람을 믿지 못해 만든 것이다. 2006년 방글라데시의 무하마드 유누스는 빈곤 퇴치를 위해 그라민 뱅크라는 소액무담보대출은행을 설립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라민 뱅크는 담보 없이 서민들에게 돈을 빌려준다. ‘사람은 정직하다’는 믿음으로 대출해줄 때 담보나 보증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삶의 의지를 본다고 한다. 꿈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각박한 세상에서 믿을만한 사람이 되는 것은 성공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믿을 만한 사람이 되면 저절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개인만 신뢰가 중요한 게 아니다. 집단, 조직, 국가도 마찬가지다. 기업이나 국가에 대해서도 신용등급을 매긴다. 어떤 기업은 정직하고, 어떤 기업은 꼼수를 부린다. 어떤 사회는 신뢰도가 높고 어떤 사회는 거짓이 난무한다. 어떤 국가는 투명하고, 어떤 국가는 부패가 심하다.

미국의 석학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사회적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트러스트’라는 책에서 “국가의 경쟁력은 그 사회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신뢰 수준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신뢰가 부족한 사회는 거래비용이 많이 들고 정직, 책임감, 의무이행 등 사회협력을 위한 가치가 부족하기 때문에 선진국에 진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신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중요한 사회적 자본이다. 선진국과 후진국은 신뢰도의 차이가 크다. 가령, 음식점에서 고기를 먹을 때 원산지 표기를 속이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 정부나 공공기관 발표를 믿지 못하는 분위기, 부동산 계약을 할 때 사기를 당할 것만 같은 불안감 등은 사회적 신뢰도가 낮은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뉴욕 보석상은 상인들 간에 계약서나 각서 없이 거래한다고 한다. 대부분 같은 유대인이고 상호신뢰가 충분히 쌓여있기 때문이다. 제도나 법을 만든다고 하루아침에 사회적 신뢰도가 높아지지는 않는다. 사회적 신뢰는 개인의 정직성과 사회 전반의 투명성이 오랜 기간 축적되면서 만들어지는 문화이다. 신뢰를 쌓기는 힘들고 오래 걸리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대한민국도 이제 선진국 문턱에까지 올라섰다. 김영란법이 우리 사회를 단시간에 투명사회로 만들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사회의 투명성과 신뢰도를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출발점은 될 수 있다.

최연구 한국과학창의재단 연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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